이제는 희미해진 사랑의 기억,
그 기억 속을 통과하는 따뜻한 멜로디, [봄날은 간다] 사운드트랙
여자는 단호한 얼굴로 남자에게 말한다. ‘우리 헤어지자’... 그 뜻밖의 결별 의지에 남자는 당혹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 할게’... 이미 떠나간 사랑도 노력해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버스와 여자는 떠난 다음에 잡는 게 아니라는 혜안이 담긴 노인의 충고처럼, 흘러간 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냐고 남자는 다그치지만, 그게 사랑인 것을. 뭘 간절히 바래도 결국은 다 잊혀지고 기억도 희미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인 것을.
지방 방송국 프로듀서겸 아나운서인 은수와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 프로그램 작업차 만난 두 사람은 소리채집 여정을 반복하면서 곧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결혼에 실패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은수는 정직하게 다가오는 상우의 사랑이 부담스럽다. 은수는 곧 결별을 선언하고 실연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상우에게 무심히 세월은 쌓인다. 통과의례와도 같은 그 열병같은 사랑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과연 몇 번의 봄날을 견뎌내야 하는 것일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죽음의 그림자에서 꽃핀 첫 사랑의 아름다움을 안타깝게 포착한 허진호 감독은, 이 영화 [봄날은 간다]를 통해 사랑의 감정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사라진 다음에 기억만 남아있을 때의 느낌, 그 기억조차 사라진 다음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했다.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곧 잊혀지는 감정의 순환.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던 노래 '봄날은 간다'의 한 토막처럼 통속적인 유행가 가사와도 같은 사랑의 흐름이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과 상우와 은수가 담아내는 소리를 통해서 더욱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자락으로 각인된다. 대숲 바람소리, 산사의 풍경 소리, 바닷가 파도 소리... 결국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강진 보리밭에서 상우는 혼자서 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바람결에 문득 은수의 콧노래가 들려오는 듯 아득한 느낌도 받지만, 그의홀로서기를 지켜보는 우리 역시 이젠 담대해질 것 같다.
들릴듯 말 듯 우리 삶 위를 부유하는 소리를 통해 사랑의 그 미세한 떨림까지도 포착해내고 있는 영화. 그런 만큼 음악에 남다른 공력이필요함은 물론이다. 바로 그 음악을, 허진호 감독의 아카데미 졸업작품인 [고철을 위하여]는 물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함께 했던 지우(知友) 조성우씨가 맡았다. '소리'가 매개체가 되는 영화라서일까? 조성우씨의 영화음악은 소리 길을 통과해 가면서 그 소리의 여백마다 조심스러운 호흡을 건네고 있다. 이제까지 만나본 그의 영화음악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사려깊다. 햇살 고운 사랑의 풍경보다는 그 풍경이 사라진 뒤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선율. 봄날은 가지만 또 다른 봄날을 기대하는 모든 연인의 소망이 담겨있듯 조성우씨의 영화음악은 일관된 톤으로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 저편의 잔상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름답지만 가슴 한편이 아리다. 특히 피아노와 현, 클래식 기타는 물론이고, 어린 시절의 풍금 소리가 연상되는 아코디언을 통해 변주되는 영화의 메인 테마는, 짧았던 순간의 찬란했던 추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든다. 특히 국내 아코디언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심성락씨의 복고적인 음색은 묘한 노스탤지어로 다가온다. 그렇듯 영화 전편을 추억의 향기로 채색하는 영화의 메인 테마는 은수의 테마, 상우의 테마, 그리고 두 사람의 러브 테마로 또 다른 소리의 결을 만들어내면서 그들의 사랑과 절망, 그리고 상실과 그리움에 깊이를 더해준다.
특히 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위해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주제곡을 새롭게 편곡했듯 조성우씨는 만남과 헤어짐의 그 안타까운 감정의 기복을 위해 '봄날은 간다'와 독일 가곡인 '사랑의 기쁨 Plaiser D'amour '을 또 다른 호흡으로 다듬어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상우의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구슬프게 한가락 뽑던 '봄날은 간다'는 트럼펫과 아코디언을 통해 묘한 향수를 전해주고 있고, 정선의 아우라지내에서 은수가 허밍으로 부르던 '사랑의 기쁨 Plaiser D'amour '은 클래식 기타리스트 오승국씨의 맑은 톤으로 탄생되고 있다. 물소리를 담던 상우가 은수의 콧노래에 마이크를 들이대던 장면. 그녀의 노래는 사랑이 주는 햇살고운 기쁨이 담겨있다. 하지만 상실의 시간, 그 기쁨의 속삭임은 어떤 아픔으로 다가올 것인가? 벚꽃이 만개한 어느 봄날, 상우와 은수의 헤어짐 위로 역설적으로 깔리던 '사랑의 기쁨
Plaiser D'amour '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왕가위 감독은 왕비가 가게에서 늘 틀어놓던 마마스 앤 더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과 직접 불러주는 '몽중인'이 그녀의 나레이션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말을 했다. 유지태가 불러주는 '그해 봄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상우의 테마'에 노랫말을 붙인 바로 그 곡 '그해 봄에'. 그다지 말이 없던, 사려깊고 침착하던 상우는 결국 노래를 부르면서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가 부다. '나 참 먼 길을 아득하게 헤맨 듯해. 얼마나 멀린 간 걸까 그해 봄에...' 이제는 초연할 수 있는 젊은 날의 아픈 사랑을.
게다가 출중한 개성과 독특한 보이스 컬러를 지닌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는 엔딩 타이틀곡 '봄날은 간다'를 토해내면서 상실과 그리움이 겹겹이 쌓인 이 서글픈 멜로 드라마 위에 남다른 카리스마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이 곡은 일본의 정상급 뮤지션 마츠토야 유미(Matsutoya Yumi)가 만든 곡에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랑들...'처럼 김윤아가 직접 쓴 노랫말이 더해져 더욱 애잔한 그리움을 사색하게 만든다. 게다가 일본에서 발매된 사운드트랙에선 마츠토야 유미가 직접 불러주는 엔딩 타이틀곡이 첨가될 예정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뉴에이지 아티스트겸 피아니스트로 감성에 호소하는 서정적인 멜로디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사오 사사키(Isao Sasaki)와 역동적이면서도 대담한 테크닉을 지닌 크로스오버 바이올리니스트 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