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5일 어느 화창한 가을, 나탄 밀스타인은 이미 그가 이전에 몇 차례나 가졌던 뉴욕의 카네기 홀에 들어섰다. 아마 화려했던 밀스타인의 연주 경력가운데서도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거기 참석한 누군가의 말처럼 아마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국제회의’ 라도 되는 것처럼 정말 모든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거기 모였다. 요셉 푸흐, 이작 펄먼에서 모든 쥴리어드나 커티스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까지 그야말로 모든이들이 거기 모여 여전히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는 밀스타인의 놀랍도록 생명력 넘치는 기교를 감상하기 위해서였고 물론 음악에 인생을 바친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의 연주는 밀스타인 연주경력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지만 또한 그의 나이가 주는 낙조의 그늘도 필수불가한 일이었다. 이제 러시아 바이올린 학파의 마지막 찬연한 거장이 될지도 모르는 장엄한 연주는 러시아 세인트 페터스부르크 어느 스튜디오에서 스승이자 선배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레오폴드 아우어와의 조우를 시작으로해서 20세기의 중심을 가로질러 거장이 이룰수 있는 마지막 정점에 도달 한 순간이었다. 독특한 침착함을 갖췄던 하이페츠도 영원한 침묵의 세계에 빠졌고, 미샤 엘만(Mischa Elman), Toscha Seidel(토샤 세이델), 이프렘 짐발리스트(Efrem Zimbalist)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1979년까지도 밀스타인은 열정적인 연주를 계속한 유일한 거장이었다. 그날 저녁 밀스타인은 바흐의 D단조 파르티타의 샤콘느를 초절적 드라마로 이끌었고, 프랑크의 A장조 소나타를 우아하고 당당한 현학적 긴장감속으로 몰아넣으며 우리에게 잊지 못할 저녁을 선물하며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갔다.
1904년 정확히 마지막날 러시아의 오데사(Odessa)에서 태어난 밀스타인의 음악적 재능은 일곱살부터 당대의 유명한 바이올린 선생인 스토리아르스키(Stoliarsky)를 사사하게 만들만큼 뛰어난 선구안을 지녔던 그의 부모에게 먼저 띄었다. 후에 밀스타인은 세인트 페테스부르크에서 이미 전 유럽을 상대로 확고한 자리를 굳혔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밑에서 다시 정식 음악교육을 받는다. 그의 밑에서 1914년까지 다양한 음악교육을 받는데, 그해 열렸던 학생 콘서트에서의 최종무대에서 5살의 어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와의 첫 만남은 이후 많은 러시아 출신의 거장들과 교류를 하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밀스타인의 정식 데뷔는 그 다음해인 1915년으로 글라주노프가 직접 지휘하는 한 협주곡 무대였다. 이 데뷔무대는 커다란 반응을 몰고와 밀스타인은 향후 5년간 러시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밀스타인은 레오폴드 아우어를 따라 완전히 페테스부르크에 정착했다. 1923년 이후 계속되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와의 합동공연으로 밀스타인은 더욱더 확고한 명성을 얻기 시작하는데 호로비츠와의 인연은 그가 솔로로 활동하던 당시 호로비츠의 여동생인 레지나(Regina)가 그의 피아노 반주자로 리사이틀을 함께 하면서 비롯됐다. 어쨌든 호로비츠와의 듀오 명성은 전 유럽으로 급파되어 고국 러시아를 떠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 당시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yatigorsky)와 트리오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1925년에 밀스타인은 그의 조국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1925년 연주지인 독일전역과 빠리등지에서 그의 연주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며 온 유럽이 그의 연주를 초청하기 위해 들끊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마침내 그의 성공소식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전해졌고, 급기야 뉴욕 필하모닉과의 협연 초청연주를 갖게 되고 열화와 같은 미국인들의 환영을 받게된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바쁜 연주회를 가지던 중 전쟁발발과 더불어 미국에 완전히 귀화하여 전쟁 희생자를 위한 많은 자선 콘서트를 가졌다. 1948년 다시 유럽연주회에 나서 전통의 비엔나, 루체른, 잘즈부르크 페스티발등에 참가했다. 토스카니니, 모리나리, 클라우스, 푸르트벵글러, 부르노 발터, 크나퍼츠부쉬, 쿠제프츠키, 스토코프시키등의 20세기를 풍미한 많은 지휘자와 협연무대를 가졌으며 그 스스로 바이올린으로 많은 곡들을 작곡하거나 편곡하기도 했다.
밀스타인은 흔히 러시아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본능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신비로움이 사실은 지성에 의해 모두 제어 받는 완벽주의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밀스타인은 언급했듯이 호로비츠나 피아트고르스키나 토스카니니 그리고 모리나리등과의 협연무대로도 거장의 이름을 날렸지만, 가장 독자적인 해석을 남긴 독주자로서도 유명하다. 그의 날카로운 기질은 확실한 연습이 밑바탕이 되어 확고해졌고, 유려한 라인은 고전적이며서 순수했다. 선율 역시 크지는 않았지만, 힘이 실려지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밀스타인은 그러한 힘을 악기에 싣기 위해 여러 차례 보잉 스타일을 바꿔나갔는데, 물리적 힘에 의한 압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연습에 의한 철저히 빠른 동작을 통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인토네이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났는데 이유는 비브라토가 지나치게 크거나 시간이 지나서도 물리기 않았기 때문이다. 밀스타인의 주요 협주곡에 대한 해석은 일종의 고귀함과 아울러 자극적인 감성도 혼합되어 있다는 평을 받는다. 밀스타인이 연주한 수많은 레파토와 중에서도 특히 <파가니니아나>, 또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카덴자 부분등에서 최고의 테크닉을 보여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968년에 ‘레종 드 오노Officier de la Legion d'honneur’를 수상했으며 1986년 베니스에서 ‘음악의 평생 공로상A Life for Music'상을 수상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