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아이
아직 핏덩이를 이 땅에 묻으며
파란 눈의 당신들은
그 무엇을 바라보았었나요?
당신들의 남편을 아내를 친구들을
여기에 묻으며
당신은 무얼 말했었나요?
흙이 다 덮히고 사람들은 다 돌아가고
터져오르던 오열도
지쳐 말라 버렸을때,
떠오르던 진정 순수한 생각은
어떤 것이었나요?
한알의 밀알이 죽어 백배로 열매맺혀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느느 것을 보셨지요
가장 소중한 마지막 것까지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 그 사랑의 빚을
아직도 다 갚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마지막 삽질을 마치고서
나도 이 땅에 묻히겠다는 사랑의 열정이
환상처럼 스쳐 지나갔었겠지요
감사의 존경과 사랑으로
당신들을 우러르며
우리의 길을 새롭게 결단하노니
주께서 당신들을
일어서서 맞았으리이다
이곡의 노랫말은 서성환 목사님께서 선교사 훈련 중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의 느낌과 고백을 시로 쓰신 것입니다.
한강변 한 구석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이 땅에서 주의 복음을 위해 한평생을 불살랐던 선교사님들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이 시는 백여년전 그들을 통해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을 듣고
이제 또다른 땅끝으로 사랑의 빚을 갚으러 떠나기로 결단한,
한 선교사님이 그분들의 무덤앞에서 드리는 감사와 사랑의 고백입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상당보다오 이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B.Hulbert)선교사님의 묘비명
H.G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 본부에서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로 배재학당의 설립자이시다.
선교활동 중 목포 앞바다에 전복된 배에서 한국소녀를 구하려다가
당신이 익사하시었다.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선교사님의 묘비에 적힌글.
~ 그해 칠월 양기택 선생과 함께 대한 매일신보를 창설하고
그 사장이 되시어 일본의 침략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한국민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셨다.
일본의 압력은 날로 더하여 여러번 재판을 받고 옥고까지 겪으시다가 마침내 1908년 6월 신문사에서 물러나시게 되었다.
인하여 병을 얻어 1909년 5월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이때 나이 서른 일곱이시었다.
유언에 이르기를 "나는 죽되 대한 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베델(Ernest T. Bethell) 선생의 묘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