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제에 선발된 이후 당시의 오케 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씨로부터 작곡자 손목인씨를 소개받아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 시작한다. 당시 애향심 고취를 위해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애향심 고취를 주제로 가사를 모집한 결과 1등한 가사에 손목인이 가사를 붙힌 "타향살이"를 부르게 되면서 공전의 히트가수로 등극한다.
"타향살이" 이외에도 "사막의 한", "짝사랑" 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데뷔 이해 은퇴하기 전까지 국민적인 인기를 얻는다. 일제치하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가수활동은 일제에 압박받던 한민족의 설움과 한(恨)을 노래 음절과 가사 곳곳에 담아 당시의 국민들에게 단순한 가요 이상의 위안을 줬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
1912년 울산에서 출생한 고복수는 어릴적부터 학교 공부보다는 연극이나 음악활동에 관심을 많이 보여왔으면 지역의 교회 선교사로부터 음악에 관한 기초를 익혔다.
당시로서는 녹음실이 없어 일본의 레코드 회사에서 취입한 SP음반 "타향살이(그 당시 앨범에는 원제가 "타향"으로 되어있다)"는 뒷면의 "이원애곡(梨圓哀曲)"과 함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이후에도 꾸준히 히트곡을 내며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의 반열에 오른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 일제치하라는 어두웠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노래에 담신 가사 속의 의미나 노래 속의 한은 일본인들을 자극하기 충분했으며, 이후에도 국내 순회공연은 물론 일본 공연에서도 한복을 입고 우리말로 노래해 일본인을 자극,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던 1941년 당시 함께 활동하던 가수 황금심과 결혼, 해방후 가수 전옥이 운영하는 백조악극단의 대표가수로서, 듀엣으로서 함께 가수활동을 해나간다. 꾸준한 가수활동은 6.25 동란 속에서도 계속되었지만 고복수는 1958년 8월 8일 은퇴공연을 가지는 것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난다. 이후 1972년 사망할 때까지 가요예 전반에 큰 힘이 되며 간혈적인 가수활동을 했다. 선친의 끈질기고도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트로트계에서 투신하여 한국가요계 초창기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시대의 음울함 속에서도 민족의 한과 정서를 표현해 국민 모두에게 눈물과 카타르시르를 제공한 고복수의 "타향살이"는 시대를 이어오면서 민족의 아픔 앞에서는 언제나 슬프면서도 깊은 음률로 현재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1960년 극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했으나 흥행에 실패해 서적 외판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72년 2월 10일 연세대 의료원에서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