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낭만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곡가.
1803년 프랑스 남부지방 라 코트 생탕드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플래절렛(flageolet: 플루트 계통의 목관악기), 플루트, 기타 등의 악기를 배웠다. 그리고 16살 되던 해 그는 라모와 카텔의 ‘화성론’과 달랑베르의 ‘음악원리’를 통해 배운 이론을 토대로 <플루트와 현악4중주를 위한 5중주곡>을 처음으로 작곡한 사람이다.
베를리오즈는 1821년 대학 입학자격을 취득하고 의사였던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그는 ‘오페라의 개혁가’ 글룩의 오페라에 심취하게 되고 의학 강의에 출석하기보다는 오페라 극장에 더 열심히 드나들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1823년 이후부터는 프랑스 작곡가 르쇠르에게 작곡을, 레이하에게 대위법과 푸가작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같은 해 가을 <장엄미사곡> 작곡에 전념한다. 이 곡을 위해 그는 1825년 성 로크 교회에서 자비로 연주회를 열었는데 곡에 대한 반응은 좋았으나 이로 인해 그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182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해 작곡법과 푸가를 공부하고 로마대상 콩쿠르에 도전하지만 몇 번이나 고배의 잔을 들다 1830년 <환상 교향곡>과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최후의 밤>으로 드디어 대상을 받고 로마에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한편 파리를 방문한 영국 셰익스피어극단의 아일랜드 여배우 하리에트 스밋슨 Harriet Smithson 을 보게 된 그는 짝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명곡으로 꼽히는 그의 대표곡 <환상교향곡>(1830)은 바로 그녀를 사랑하는 베를리오즈 자신의 마음이 담긴 곡이다.
이 곳에서 그는 리스트, 쇼팽, 힐러, 넬바르 등과 교류하는 한편 자작의 연주회와 작곡 등 활발하게 활동을 펼쳐간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이탈리아의 추억을 담은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럴드 Harold en Italie>(1834), <레퀴엠>(1837), 오페라 <벤베누토첼리니 Benvenuto Cellini> (1838), 독창과 합창이 교차하는 극적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1839) 등이 있다.
하지만 1838년 <벤베누토첼리니>의 상연이 4번 공연을 마지막으로 실패하고 파리에서 활동무대를 잃은 그는 1842년부터 국외로 활동무대를 펼쳐갔다. 1842년에는 독일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면서 서곡 <로마의 사육제 Le Carnaval romain>(1843)를 작곡하고 <근대의 악기법과 관현악법>(1844)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후 1845-46년의 프라하 부다페스트에서의 연주여행이 성공하면서 그는 귀국 후 <파우스트의 겁벌(劫罰) La Damnation de Faust>(1846)을 완성시키고 초연한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1847년에는 러시아와 영국에서 장기 체류할 예정이었으나 이듬해 프랑스혁명(2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다시 마음을 바꿔 귀국했다.
1850년에는 ‘필하모닉협회’를 결성, 혁명 후의 파리에서 적극적인 연주활동을 추진했으나 역시나 이듬해 좌절되고 다시 국외 연주여행을 떠나게 된다. 1854년에는 3부작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시절 L'Enfance du Christ>이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1849년에는 연주장소를 얻지 못해 초연되지 못했던 작품 <테 데움 Te Deum>이 만국박람회 개막을 축하하며 연주되었다. 1856년에는 마침내 프랑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되고 그는 생활에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만년에는 2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 Les Troyens> 의 작곡에 열중했으나 상연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1863년 제 2부 <카르타고의 트로이 사람 Les Troyens a Carthage>만이 상연할 기회를 가졌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희극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1862)가 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연주여행은 1867-68년의 러시아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끝냈고 지병의 악화로 1869년 3월 파리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음악사적으로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교향곡을 작곡한 사람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으며 또한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한 작곡가라는 점에 있다. 그의 독특한 ‘관현악법’은 후대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관현악법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편 뛰어난 문장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가 남긴 자서전 <회상록>과 몇몇의 음악에 관한 비평 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by denke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