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
1925년경에 도쿄 중앙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
졸업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근무하면서 연극단체인 《토월회》와 《취성좌》의 막간가수로 출연하고 독창회를 열기도 하였다.
1930년경에 《콜럼비아》에 《류랑인의 노래》, 《희망가》, 동요 《봄노래》 등을 취입하였다.
그는 한때 하세가와 이찌로(長川一郎)란 이름으로 고가마사오(古賀正男)의 작곡인 《님자취 찾아서》를 비롯한 일본노래들을 취입한적도 있으나 친일파는 아니였다. 그의 음색이 맑고 가창력이 좋기때문에 일본레코드회사의 요청으로 음반들을 취입하였을 따름이다.
그는 일제의 경찰에 자주 체포되고 취입한 노래들은 《금곡》으로 압수되기도 하였으며 《수난의 가수》란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들국화》, 《뜬세상(부세)》, 《종로네거리》, 《서울노래》가 《금곡》으로 탄압을 받은 노래이며 압수된 음반들이다.
전해오는 노래들은 외국곡들을 제외하고 위에서 이야기 한 《류랑인의 노래》, 《희망가》, 동요 《봄노래》와 함께 《방랑아의 노래》, 《시들은 청춘》, 《눈물의 부두》, 《봉자의 노래》, 《마라손제패가》, 《순풍에 돛을 달고》, 《북극오천키로》 등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