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연주자 이슬기 [그리고 그리다 II]
시조에 깃들어 있는 '그리움', '기다림'과 같은 고유의 정서를 찾는 것에 집중도를 더하여 전통성악부분인 가곡의 가사 같은 곳에서 소재를 찾고자 하였다. 여러 가지 인간의 삶의 모습을 반영한 시조를 골라 다양한 음악으로 새로운 곡을 만들고 시조를 새롭게 편곡하여 가야금과 현악사중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는 평소 친숙하지 않던 시조의 가사에 좀 더 주목하여 그 의미를 새로운 장르의 음악으로 해석해보려는 노력이며 알려지지 않은 시조를 발굴하여 현대 창작 기악곡으로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한국음악의 장르를 개척하고자 한다.
1. "바람은 지동(地動)치듯 불고" (송죽전승 민간풍류 中 타령,군악/12현 가야금:이슬기) - 바람은 지동(地動)치듯 불고 궂인 비는 붓드시 온다. 눈 정(情)에 거룬 님을 오늘 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 첩처서 맹서(盟誓)를 받았더니 이 풍우중(風雨中)에 어이 오리, 진실로 오기곧 오량이면 연분(緣分)인가 하노라, 여창 가곡 "우락"의 가사를 들으면 서 궂은 날씨에도 약속한 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밤. 과연 임이 왔을까? 나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는 임이 왔으리라 믿고 싶다. 임을 기다리는 기다림과 만남에 대한 기대를 담아 민간풍류 중 타령과 군악을 연주하고자 한다. 민간풍류는 조선 후기 풍류방에서 연주되어 전승되고 있는 민간의 음악으로, 능청능청한 타령과 당당하고 확신에 찬 군악을 들으며 기다림의 시간을 이겨낸 여인의 꿋꿋함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2. "모란은 화중왕(花中王)이요" (이지영 작곡/25현 가야금:이슬기, 바이올린:조은기,서진희/비올라:홍수정/첼로:장유진) - 모란은 꽃 중의 왕이요, 해바라기는 충신이로다. 연꽃은 군자요. 살구꽃은 소인이로다. 국화는 숨어사는 선비요. 매화는 뜻을 지키며 매섭게 사는 선비로다. 박꽃은 노인이요. 패랭이꽃은 소년이라. 접시꽃은 무당이요, 해당화는 기생이로다. 이 중에 배꽃은 시를 짓는 풍류객이요. 붉은 복숭아꽃, 복숭아의 푸른 나뭇가지. 세 가지 색깔의 복숭아꽃은 풍류를 즐기는 남자와도 같다. -김수장
이 곡은 꽃의 아름다움을 가야금과 현악사중주로 편곡한 곡으로 꽃의 처음 봉우리에서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아련하고 신비로운 느낌으로 앞 부분에서는 피치카토와 가야금이 절제된 대화를 주고 받고, 조금씩 솔로 악기들끼리 주고받는 마지막에서는 가야금의 현란한 아르페지오를 통해 꽃이 만개하는 절정이 돋보인다.
3. "꿈에 다니난 길이" (김수진 작곡/25현 가야금:이슬기, 바이올린:조은기,서진희/비올라:홍수정/첼로:장유진/비브라폰:이희경) -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라도 남는다면 임의 집 창 밖에 난 길이 돌길이라도 다 닳았겠지만 꿈 속에 다니는 길에는 자취가 남지 않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 이명환 - 현실에서의 바람을 꿈으로 옮겨 임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한 연정가이다.
만약 자신이 다녀간 자취가 남기라도 한다면 임의 집 앞 자갈이 다 닳아 없어질 것이라는 대목은 너무 간절하여 자신을 몰라주는 임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욱 극대화한다. 작곡가 김수진은, 이 시조의 첫 느낌은 ‘정적인 절절함의 극대화’ 였기에, 절제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극도의 애절함을 표현하는 한편의 드라마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도입부에서 꿈속의 몽환적 이미지를, 곧이어 등장하는 메인테마 부분에서 절제된 애절함을 나타낸 후, 살짝 뒤로 빠져 주변을 맴도는 화자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가야금의 옥타브 꾸밈음으로 애증을 표현하는 격한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현악파트는 망설임으로 화답한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점점 고조되었던 브릿지는 4/4의 변형된 매인 테마로 감정의 절정을 찍은 후,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4. "서산에 일모(日暮)하니" (시조(이명환)/ 나실인 작곡/ 25현 가야금, 노래:이슬기, 바이올린:조은기,서진희/비올라:홍수정/첼로:장유진/비브라폰:이희경) - 서산에 일모하니 천지에 가이없다. 이화에 월백하니 임생각이 그리워라. 두견아 너는 누굴 그려 밤새도록 우느니 - 이명환 - 해가 서산에 저물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니, 어디까지가 땅이요,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분간할 수가 없고, 앞뜰 큰 배나무에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을 보며 님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이 때 들리는 두견의 소리는 마치 내 마음을 아는 듯 하다. 이렇게 환상적인 광경과 낭만, 마음 속에 깊이 모셔둔 사랑을 노래한 이 시조는 여창 계면 ‘중거’로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시조의 낭만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자 노래와 가야금, 비브라폰, 현악4중주를 위해 새롭게 작곡되었다.
5. "동짓달 기나긴 밤을" (Thomas Osborne 작곡/12현 가야금:이슬기, 바이올린:조은기,서진희/비올라:홍수정/첼로:장유진/비브라폰:이희경) -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임 오시는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 이 곡은 내게 영감을 주었던 이슬기를 위해 지었으며, 그녀에게 바치는 곡이다. 그녀는 내게 황진이의 유명한 시조 구절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움과 소망이 가득찬 그 구절에 따라 이 곡을 두 부분으로 작곡하였다. 첫 부분은 애통함을, 그리고 가야금 솔로 이후에 나타나는 두번째 부분에서는 기대에 대한 불안과 흥분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작곡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현악기들이 함께 첫부분과 다른 느낌으로 짧게 연주되며 곡은 끝난다.
6. "북두칠성(北斗七星) 하나 둘 셋 넷" (나실인 작곡/25현 가야금:이슬기, 바이올린:조은기,서진희/비올라:홍수정/첼로:장유진/비브라폰:이희경) - 북두칠성(北斗七星)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분께 민망한 발괄 소지(所誌) 한 장 아뢰나이다. 그리든 님을 만나 정(情)엣 말삼 채 못하여 날이 쉬 새니 글로 민망 밤중만 삼태성(三台星) 차사(差使) 놓아 샛별 없이 하소서 - 작자미상 -
이 작품은 여창 계명 ‘평롱’의 시조 내용을 바탕으로 가야금 독주와 현악 4중주, 비브라폰을 위해 작곡되었다. 이 시조에서 화자는 그리워하던 님을 만났으나 날이 벌써 새려하니 샛별을 거두어 밤을 길게 해달라고 북두칠성에게 부탁하고 있다. 간절한 기다림과 바램 끝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이 작품을 듣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 안에는 기쁨과 감동,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과 깨달음, 감사한 마음, 미래를 위한 의지와 다짐, 문득 생기는 불안한 마음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강인함 등이 표현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