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낙이불류]
프리뷰: 이소영(음악평론가)
가야금 연주계의 차세대 대표 주자로 주목받아 온 이슬기의 8집 음반이 출반되었다. ‘즐거워도 지나치게 흥청거리지 않는다’는 뜻의 “낙이불류”(樂易不流 I.II)를 타이틀로 하여 1집에 6곡, 2집에 5곡이 수록되어 있다. 이번 음반은 산조와 민간풍류 등 민속악에 탄탄한 뿌리를 두고 정악에 바탕을 둔 절제되면서도 농익은 음악성, 현대 가야금 창작곡들의 실험을 일찍이 섭렵한 고난도의 연주 테크닉 등 3박자를 골고루 갖추며 이제 중견 연주자로 우뚝 성장한 이슬기의 연주세계를 여러가지 인공 감미료 없이 ‘쌩얼’같은 정공법으로 보여준다는 데서 의미가 사뭇 크다.
음반의 레퍼토리는 황병기, 백병동, 이해식, 강준일, 임준희, 유도원, 윤혜진 등 국내 유수의 작곡가들과 한국창작국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하와이 대학교의 토마스 오스본, 도날드 워맥의 창작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가야금의 주옥같은 창작 작품들을 망라함으로써 동시대적인 21세기 한국음악의 새로운 출구를 갈구하는 국악 청중들에게 현대 가야금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2005년부터 2017년까지 12년에 걸쳐 연주자가 틈틈이 녹음해 온 곡들이어서 20대의 풋풋함에서부터 30대 후반에 이르는 연주의 완성도와 음악적 성숙함에 이르기 까지 그의 연주세계의 추이를 한 번에 가늠할 수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낙이불류 I은 연주자가 20대 중반이었던 2005년부터 연주회를 마치고 기록처럼 녹음해두었던 곡들을 수록하였고 낙이불류 II는2017년 12월 이슬기 가야금 독주회에서 연주되었던 5곡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였다. 마스터링은 녹음필드 레코딩 전문가이자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상을 수상한 음향엔지니어 황병준이 맡았다.
[In the Green Cafe], [Blossom], [그리고 그리다] I, II 등 크로스오버 및 퓨전 국악 음반을 통하여 가야금의 대중화에 선두 주자로 알려진 이슬기이기에 이번 음반은 대중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이지리스닝 성향을 거세하고 반대로 실험적이며 현대적인 가야금 기법을 탐구해온 연주자의 또 다른 면모와 그 진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미 이슬기는 2015년 [참을수 없는 이야기- 죽파]와 2016년 [연분, 가야금- 소리를 머금다] 음반을 통해 죽파 줄풍류 전바탕과 가야금과 인성이 결합된 정악적 재구성 연주 등을 시도함으로써 전통음악의 본령에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음반은 이러한 이슬기의 확장되고 깊어지는 음악적 행보가 어떻게 고도의 테크닉과 음악적 밀도를 필요로 하는 현대 가야금의 세계에 까지 맞닿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이번 음반에서 특징적인 것은 현대 가야금의 난해함을 이슬기 특유의 인성(노래)과 결합시켜 감성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슬기는 가야금 산조 및 줄풍류 외에 일찍이 가야금 병창과 가곡 등을 학습하여 가야금 연주자 중 보기 드물게 노래를 악기 연주에 결합시켜 가(歌)와 악(樂)의 공존을 몸으로 체득시켜 왔고 이러한 결과물을 6집과 7집 음반에서 보여준 바 있다. 그간 가야금 병창이 판소리와 남도 민요에 뿌리를 둔 민속악 가창법에 국한된 데 비하여 이슬기는 정가나 시조 발성도 섭렵하여 이를 자신의 창작곡이나 작곡가들의 창작곡에 녹여내어 가야금 병창의 새로운 영역을 발굴하고자 하였다. 본격 창작곡 음반인 이번 음반의 수록곡 중 이슬기 자신의 창작곡 [내 정은 청산이요]와 윤혜진 작곡의 [거기에 있다 취하라]에서도 이러한 가야금과 인성의 결합은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어 나타난다. 이렇듯 가야금창작곡에서 연주자가 직접 곡을 만들고 인성 연주를 담당함으로써 현대 가야금 병창의 가능성을 열어주고12, 18, 25현 가야금의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 등의 창조적 음악하기(= 뮤지킹musicking)는 연주자가 창작자의 음악적 이상을 매개해주는 전달자 역할에 머무는 20세기적 현대 예술의 패러다임을 넘어 연주와 작곡, 민속악과 정악, 전통과 현대, 악가무 일체의 통합과 경계 넘기를 추구하는 21세기적 현대 예술의 지평 속에서 의미 지워질 수 있다.
실제 접했을 때의 이슬기의 성품이나 음악은 일관되게 소박, 담백, 절제, 여운에 바탕한 ‘맑음’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와 달리 매체에서 접하는 이슬기에게는 늘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문재숙 명인의 딸이고 미스 유니버스 이하늬의 언니라는 것이다. 두 자매가 함께 서울대 국악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 국악인 집안 출신으로서 한마디로 국악계의 대표적인 ‘금수저’에 해당한다. 누구의 딸, 누구의 언니라는 출신 배경은 처음 입신할 때 유리한 이점이 있지만 정작 입신 이후 자신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고유한 연주 세계에 대중의 시선을 오롯이 집중시키기에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번 음반은 이슬기를 둘러싼 음악 외적 요소와 연관된 표피적인 관심을 불식시키고 실험적이고 예술적 깊이를 추구하는 이슬기의 진지한 도전 정신을 음미하고 진정성 있게 추구해온 그의 깊은 음악세계에 함께 빠져드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대중성 있는 크로스오버나 퓨전국악부터 전통의 재구성과 아방가르드한 실험에 이르기까지 한 연주자가 운용할 수 있는 스팩트럼의 크기나 한계를 계속 돌파해 준다는 점에서도 후학들에게도 적지않은 자극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록곡
낙이불류 I
1. 정취 -백병동 작곡 (TRACK 1)
2. 남도환상곡 – 황병기 작곡 (TRACK 2-5)
3. 불꽃으로부터 명상 – 이해식 작곡 (TRACK 6)
4. 하늘에 대하여 – 토마스 오스본 작곡 (TRACK 7–10)
5. 율새 – 강준일 작곡 (TRACK 11-17)
낙이불류 II
1.줄타기 – 도날드 워맥 작곡 (TRACK 1)
2. 젖은 옷소매- 임준희 작곡 (TRACK 2)
3. 3대의 가야금을 위한 [풍경III] -유도원 작곡 (TRACK 3)
4. 내 정은 청산이요 – 이슬기 작곡 (TRACK 4)
5. 거기에 있다, 취하라 – 윤혜진 작곡 (TRACK 5-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