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핀 (Huckleberry Finn)[오로라피플 (Aurora People)]
“허클베리 핀, 바다를 품고 돌아오다”
바다를 바라본다. 깊고 푸른 바다. 부드러운 모래 위에 앉아 바다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다를 닮았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세상의 모든 감정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고, 이를 다른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는 사람. 그리곤 그 언어에 반응하여 돌아오는 타인의 감정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깊숙이 품어낼 줄 아는 사람. 그래서 깊고 푸른 바다를 닮았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물결처럼, 계속해서 풀어내고 품어내니까.
‘허클베리 핀. 그들의 음악도 바다를 닮았다.’
20년, 그리고 7년만의 귀환
허클베리 핀은 무겁다. 이름에도 무게가 있다면, 이들은 단연 초중량급이다. 이기용의 진두지휘 하에 탄생한 감각적인 사운드와 멜로디, 은유와 비유를 넘나들면서도 심장을 찌르는 듯한 위력적인 가사, 그리고 이소영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몽환적인 목소리의 결합은 이들을 타 밴드를 압도하는 무거운 카리스마를 가진 밴드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것도 무려 20년 동안. (허클베리 핀의 첫 앨범 [18일의 수요일]이 발표된 것이 1998년이다)
바다도 끊임없이 흐른다. 이들도 1집 [18일의 수요일]부터 5집 [까만 타이거]에 이르기까지 한 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허클베리 핀이라는 이름이 추구하는 본연의 색을 지키면서도 그 안에서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색했고, 그 변화는 껍질만 갈아 끼우는 조잡한 것이 아닌 겉과 속을 어우러지게 만들어내는 완성형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그들이 발표한 정규 앨범 대다수가 대한민국 대중음악 명반의 대열에 합류해있다.
참 얄궂은 사람들이다. 무려 7년 만의 귀환이다. 간혹 싱글은 발표했지만, 정규앨범은 2011년 5집 이후 처음이다. 그들의 음악을 애정하는 마음도 그대로이고, 바다도 그대로인데 시간만 야속하게 빨리 간 것 같다. 그래서 20주년, 그리고 7년만의 정규앨범 [오로라 피플]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래오래 애태우며 기다린 보람이 있는 음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늦었다고 타박할 수도 없다.
바다에서 다시 태어나다.
허클베리 핀은 한 때 제주에 살았다. 지금은 돌아왔지만, 제주 생활은 그들에게 있어 새로운 음악적 자양분이 된 것이 분명하다. 바다를 닮은 사람이 바다 곁에 살면서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따라서 [오로라 피플]은 원초적으로 바다에서 태어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제주 바다 곁에서 느낀 이들의 감상과 정서가 많이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다 내음도 난다. (5집에서는 이기용, 이소영의 2인조로 활동했지만, 이번에 기타/신시사이저/베이스를 담당하는 성장규가 합류해 다시 3인조가 되었다.)
1. 항해 - “나는 너의 다른 세계, 나는 너로 태어났어”
이기용의 설명처럼 바다를 느릿느릿 항해하던 배가 점점 바다 위로 떠올라 어느새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대기권을 통과해 우주로 끝도 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연상되는 곡이다. 두터운 사운드 사이로 춤을 추는 피아노 선율과 하늘로 전개하는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그 상상력을 더욱 구체화 시켜준다.
2. 누구인가 - “갈라진 구름 속의 하늘로 너의 빛들이 모여”
무겁게 짓누르는 사운드로 시작하는 곡으로, 공감각적인 언어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이기용 이소영 두 멤버의 목소리 존재감이 대단한 곡이다.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The XX’의 로미와올리버가 떠오를 정도다.) 돌림노래 방식으로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점도 흥미롭다.
3. 너의 아침은 어때 - “넌 나에게로 완전히 열려야 닫힐 수 있는 문이었어”
첼로 연주가 가미된 몽환적인 곡이자,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곡이다. 특히 이소영 특유의 보컬 표현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강약을 조절하는 노련함, 가사를 완벽히 체득한 연기력, 힘과 기술의 조화 모두 완벽하다. 노랠 부르는 표정마저 궁금해진다.
4. 영롱 - “괜히 뒤돌아 봤어 눈을 보았어 괜히”
제목 그대로 아련한 가사와 영롱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추억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허클베리 핀이 표현하면 이렇게 감성적임을 보여주는 듯 한 곡으로, 다가왔다 멀어져 가는 감정을 잘 살린 신시사이저와 예쁘게 다듬어진 화음으로 목소리를 덧입힌 보컬 연출도 훌륭하다.
5. Darpe - “넌 나의 버려진 폐허에서 다시 넌 살아난다, 그렇게 내 앞에서”
기승전결이 확실한 모던록 사운드를 보여주는 곡. 가사는 ‘너’와 ‘내’가 계속 반복 교차되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어, 가사 맥락보다는 텍스트에 사운드가 더해진 곡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이렇듯 허클베리 핀의 음악은 논리보다는 감성으로 접근해야한다.
6. 라디오 - “넌 나의 슬픔 없는 모든 태양, 나의 라디오”
기타 아르페지오로 추억을 소환하고, 일렉트로닉 듀오 ‘투명’이 참여하여 완성한 섬세한 사운드가 도드라지는 곡이다. 재미있는 점은 기타 아르페지오가 곡의 입구와 출구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마치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과 클로징처럼. 어떤 프로그램이었을까?
7. 길 - “참 흔한 거리에도 늘 커다란 비밀이”
이기용의 보컬을 집중 감상할 수 있는 곡으로, 그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왈로우와는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여주고, 그가 표현하는 내밀한 정서가 여과 없이 마음에 와닿는다. 때론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8. Aurora
연주곡이지만, 그 어떤 곡보다 선명하다. 별이 쏟아지는 밤에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상을 해보라. 살아있는 오로라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9. Aurora People - “나라는 존재는 없었어 나라는 건 먼지일 뿐”
의인화된 오로라는 더욱 끝없이 날아오른다. 오로라 피플은 아름다운 동화처럼 세상을 내려 보며 지구의 바람을 맞기도 하고, 달 위에 누워서 기도도 하며, 가끔 당신을 찾아 떠돌기도 한다. 곡 중반부에는 액자식 구성처럼 변주 부분이 들어있지만, 그 흐름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10. 남해 - “그래 너는 먼 곳으로 가버렸나”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남해’는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곡이다. 반복되는 기타는 살아 숨 쉬는 배경음에 녹아들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때론 탱고 춤을 추기도 한다. 한 발 한 발 멀어져가면서.
보다 높고 넓은 곳을 향하여
“높고 넓은 곳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음반을 잘 느끼려면 어디론가 떠날 때 듣기를 권합니다.” - 허클베리 핀
허클베리 핀의 [오로라 피플]은 하늘 높이 떠 있는 오로라처럼 높고도 넓은 이상을 담고 있는 앨범이다. 텍스트와 사운드만이 아닌 전체적인 배열과 구성에서도 이들의 의도가 읽힌다. ‘살아있는 앨범’ 만들기. 자신들의 음악을 들으며 오로라가 하늘을 유랑하듯 날아다니고, 때론 자연이 보여주는 경외감에 자신을 잊었다가도 다시금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자신의 존재를 깨닫기도 하는 행위를 반복하길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앨범은 이들의 20년 공력을 모두 쏟아 부은 작품이기도 하다. 간혹 지난 앨범과 사뭇 다르다고 할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허클베리 핀의 정수는 모두 담겨있다. 다만 도구의 사용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과거에는 소리를 통해 무언가를 부수고자 했다면, 이제는 어떤 장애물도 부드럽게 관통해낼 뿐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한 단계 발전된 곡쓰기와 부드럽고도 촘촘한 사운드 디자인이다. 그저 흘려들어도 엄청난 노력이 집약되어 있음이 느껴지고,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는 그들이 추구하는 더 넓은 공간을 포용할 만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당연히 가사를 기반으로 한 음악 언어도 사운드와 완벽하게 공생하고 있다. 마치 온갖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바다처럼.
- 김홍범 (KBS 라디오P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