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 일곡일담 by 장기하
0. 프롤로그 : 모노
전곡을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로 믹스했다. 60년대 이후로 대중음악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비틀즈 1집의 오리지널 모노 엘피를 구해 듣고 충격 받았던 적이 있다. 소리들이 좌우로 펼쳐지지 않고 가운데에 다 몰려 있는데도 모든 악기가 명료하게 들렸고, 뭐랄까, 묘하게 더 집중하게 되는 사운드였다. 그때부터 모노 믹스를 꼭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번 곡들을 다 쓴 후 늘어놓으니 공통된 키워드가 “혼자”였다. 함께가 아닌 혼자...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확신이 들었다. 이번 음반은 모노여야 해! 제목도 모노! 믹스도 모노! 결과는? 여태까지의 음반들 중 가장 훌륭한 밸런스를 담아냈다고 자부한다. 즐겨 주시기 바란다.
1. 그건 니 생각이고
작년과 올해를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내용을 가사로 썼다. 마치 남에게 훈계하는 듯한 말투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다. 멋모르고 밴드를 시작한 후 십 년이 지났다. 별의별 경험을 다 했다. 다양한 사람들도 만났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은,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다. 날고 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고, 그건 경험이 쌓인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남들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씩씩한 척하며 제 갈 길 가면 되는 거다.
건반은 두 가지 악기를 섞었는데 한 개는 “Juno-106”이라는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나머지 하나는 “Vogel CMI Pro”라는 스마트폰 앱이었다. 앱은 6만 원을 주고 다운받았다. 연주도 스마트폰 스크린으로 했다.
2절의 “그대의 머리 위로~” 하는 부분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에서 샘플링한 것이다. 두 노래의 가사가 어찌 보면 정반대이고 또 어찌 보면 일맥상통하기도 해서 샘플링을 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서태지 선배님께 직접 연락을 취해 데모를 들려 드리고 허락을 구했다. 흔쾌히 허락해 주셨을 뿐 아니라 매력 넘치는 곡이라는 칭찬까지 해 주셨다.
2. 거절할 거야
전주의 리프와 코드를 먼저 만들었다. 그 다음엔 “마침내 그 날이 와 버렸네.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네”라는 가사를 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럼 이 사람은 어떤 날을 기다려 온 걸까... 거절... 거절을 하는 날! 살다 보면 거절만큼 어려운 일도 잘 없고, 또 거절만큼 중요한 일도 잘 없다.
후주의 베이스 연주가 좀 현란한데, 이 부분은 전에 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녹음했다. 일단 베이시스트 중엽에게 완전히 자유롭게 즉흥연주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충분한 분량을 녹음했다. 그러고 난 뒤 재미있는 부분들을 잘라내어 짜깁기했다. 영화로 따지면 배우에게 긴 호흡으로 연기하게 한 뒤 그걸 짧은 컷들로 잘라내어 편집한 것과 비슷하겠다.
3. 나와의 채팅
이번 앨범 중 유일하게 지난 앨범이 나오기 전에 만든 곡이다. 4집 타이틀곡이었던 “ㅋ”과 이 곡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다. 그런데 둘 다 문자메시지나 톡에 대한 내용이라 한 앨범에 넣기보다는 일종의 연작처럼 두 앨범에 나눠 싣고 싶어서 하나를 아껴 뒀었던 것. 그 당시 카카오톡에 “나와의 채팅” 기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는데, 내게는 그게 굉장히 흥미로웠다. 누구에게든 카톡을 보내면 일단 숫자 “1”이 표시되는데 “나와의 채팅”만은 그렇지 않다. 한마디로, 남이 보낸 카톡은 무시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보낸 카톡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친구에게 할 말이 생각나 카톡을 했는데, 보내자마자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했지만 자세히 보니 나는 아직 “나와의 채팅” 창에 머물러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그 자리에서 이십 분 만에 가사를 완성했다.
3집 때부터 한두 곡씩 꼭 넣어 온 멜로트론을 이번에도 사용했다. 멜로트론은 The Beatles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인트로 연주에 사용된 옛날 악기다. 건반 하나를 누르면 해당 음이 녹음된 테이프가 재생되는 방식의 악기로, 그 소리가 아주 기묘한 느낌을 준다. 디지털로 재현한 것 말고 진짜 옛날 멜로트론을 썼다. 역시 진짜는 소리가 완전히 다르다.
4. 나란히 나란히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그 사람은 왜 그걸 몰라 줄까? 그런데 한참 후, 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정말 가치 있는 노력이었을까? 상대방은 원하지도 않는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나도 지치고 상대방도 외로워졌던 것은 아닐까?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결국 다 그런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믹스가 거의 끝나갈 때쯤 양평이형이 전주와 간주에 인공적인 박수 소리를 첨가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게 결과적으로 화룡점정이 됐다. 곡의 분위기가 어딘가 밋밋해서 조금 아쉬웠었는데 그 문제가 확 해결됐다.
“어쩌면 나는 결국...” 하는 부분의 경우 보컬의 질감을 확연히 다르게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양평이형이 다시 한 번 아이디어를 냈다. 아예 통화하는 소리를 녹음하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오호...! 나는 즉시 옆방으로 가서 엔지니어 나잠 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에 대고 노래를 불렀고 나잠 수는 자기 휴대폰을 스피커폰 모드로 설정한 후 거기서 흘러나오는 내 노랫소리를 녹음했다. 결국 어떤 음악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보컬 사운드를 내는 데 성공했다.
5. 등산은 왜 할까
예전에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해. 들떴다가 가라앉으면 더 슬퍼지거든.”
그로부터 한참 후에, 우리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등산 안 해. 어차피 내려올 건데 뭘.”
따로따로 들은 이 두 말이 어느 날 같이 생각났고, 나는 이 곡을 만들게 되었다.
술 마신 다음날은 아무래도 목이 약간씩은 쉬기 마련이기 때문에 보통은 노래 녹음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해 보고 싶었다. 정말 쓸 만한 것을 건지려는 건 아니었고 그냥 연습 삼아 해 본 건데, 의외로 상당히 맘에 들었다. 살짝 쉰 목소리가 이 곡의 심드렁한 정서와 맞아 떨어졌다. 그날로 이 곡 녹음은 완성. 이상 숙취 중 녹음에 대한 변명이었습니다.
6. 아무도 필요없다
보컬, 일렉트릭 피아노, 멜로트론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편성이다. 일렉트릭 피아노는 로즈로 한 번, 월리쳐로 한 번 똑같이 쳐서 섞었다. 로즈와 월리쳐는 빈티지 일렉트릭 피아노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만한 악기들인데, 그 음색이 서로 많이 다르다. 둘을 섞어 쓴 것은 처음이다. 묘한 느낌이 나서 마음에 들었다. 멜로트론의 경우 여태껏 사용한 곡들 중 가장 돋보이게 잘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가장 멜로트론답게 썼달까.
보컬은 여러 번 녹음한 후 두 개의 테이크를 최종 후보로 남겼다. 둘의 느낌이 다 좋으면서도 서로 많이 달라서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우연히 두 개가 동시에 재생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게 베스트였다. 두 개가 너무 달라 들쭉날쭉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게 또 거친 듯 조화로웠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7. 나 혼자
어찌 보면 이 곡이 이번 음반의 주제곡이다. 이번 노래들을 만든 작년과 올해에, 나는 “혼자”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시기였다. 혼자라는 것은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아니다. 그냥 모두들 사실은 원래 혼자인 거다.
앞부분과 뒷부분의 사운드가 많이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들을 했는데, 예를 들어 드럼은 아예 두 부분을 다른 날 녹음했다. 당연히 튜닝도 다르게 했다. 후반 작업에서도 앞부분은 최대한 간결하고 건조하게, 뒷부분은 풍성하고 울리게 만들어서 대비를 주었다.
8. 초심
초심을 지키는 것이 늘 좋은 걸까? 잃지 말아야 할 가치와 태도도 분명 있겠지만 때로는 인생에서 뭔가를 과감히 바꿔버리는 것이 행복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외 음원 사이트에 올리는 용도로 전곡의 영어 제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초심”은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 영어권에는 “초심을 지켜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곡만은 영어 제목을 발음대로 “Cho Shim”이라 정했다.
가사에 걸맞게 그동안 장얼 앨범에서 해 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편곡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뒷부분에 샘플링을 활용한, 다소 edm을 연상시키는 부분을 넣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곡 자체에도, 그리고 앨범 전체에도 재미있는 색깔을 더해주었다.
9. 별거 아니라고
올 초에 외국에 다녀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가사와 멜로디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눈물이 났다. 귀국해서 마저 완성시킨 후에도 유독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던 곡이다. 내가 내 노래를 듣고 울다니 우습군, 하면서도 울었다.
이런저런 다양한 편곡을 시도해 봤지만 피아노와 최소한의 드럼만을 이용한 단출한 편곡이 노래의 정서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결론 내렸다. 간주에도 악기 솔로를 넣지 않고 그저 피아노로 코드만 짚었다. 보컬은 울림이 아예 없게, 그리고 악기 소리들은 좀 심할 정도로 울리게 잡아서 대조를 이루도록 했다.
0. 에필로그 : 사막
악기 녹음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내 보컬만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서 혼자 녹음해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곡의 공통된 키워드가 “혼자”인 만큼, 완전히 혼자인 상황에서 노래를 녹음하면 곡들에 더 잘 어울리는 정서가 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대략 한 달 뒤, 나는 사막 한복판에 서 있었다. 휴대용 녹음기와 마이크가 든 배낭을 메고 미국 조슈아 트리 사막 야외에서 노래를 녹음했다. 결과는? 돌아와서 전부 다 다시 했다. 하하하... 여행을 다녀오니 노래도 늘고 셀프 녹음 실력도 늘어버린 거다...! 게다가 더 좋은 장비도 쓸 수 있고. 돌아오자마자 시험 삼아 한 곡 녹음해 봤는데, 역시나... 사막에서 해 온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전곡을 다시 녹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 여행 덕분에 결과적으로 더 좋은 소리가 담겼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본 은하수와, 맨살로 맞았던 바람과, 그 멋진 기암괴석들은 어떤 식으로든 노래에 녹아 있을 테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