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이의 가요 이야기 : <이태리의 정원>
누구나 저마다 가슴 속에 잊히지 않는 노래 한 곡 정도는 있겠지요? 제게는 그런 노래가 참 많아요. 인생 굽이굽이 저를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대중가요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 노래들이 시도 때도 없이 가슴 속에 울려 퍼져 저를 웃음과 눈물로 위로해 주곤 한답니다. <이태리의 정원>도 그런 노래 중 한 곡이에요.
2000년대 초반,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광복 이전에 발매된 노래들을 듣고 또 들었었죠. 그때 우연히 <이태리의 정원>을 들었는데,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지고 가슴 속에서 행복감이 마구 피어올라오는 거예요. 그 전까지 저도 일제강점기 대중가요라고 하면 모두 임과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노래만 있는지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태리의 정원>은 사랑을 갈구하는 일종의 ‘구애(求愛) 노래’ 내지는 ‘프러포즈 송’에 해당하죠. 게다가 노래를 부른 가수의 성별과 노래 가사 속 화자의 성별을 일치시키면 여자가 남자에게 “세레나데를 부르면서 어서 오라”고 하는 노래죠.
광복 이전에 발매된 노래 중에는 <이태리의 정원>처럼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재즈송’이란 갈래에 해당하는 노래가 있었어요. 초창기 재즈송 중에는 노래 가사에 외래어를 사용하고 사랑의 슬픔보다 사랑의 기쁨을 그린 노래가 많답니다. <이태리의 정원>도 당시에 직접 가 본 사람이 거의 없었을 ‘이태리(Italy)의 정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곳은 “맑은 하늘에 새가 우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네요. 2절 가사에 등장하는 ‘세레나데’라는 외래어도 이 노래가 재즈송이었기에 사용가능했죠. 이처럼 당시 상당수의 재즈송이 ‘기쁨과 향락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이태리의 정원>도 그러한 노래랍니다.
이 노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이 노래는 영문학자이자 시인으로도 유명한 이하윤 씨가 작사를 했고 에르윈이라는 사람이 작곡을 했어요. 이하윤 씨는 당시 가장 큰 음반회사였던 콜럼비아 음반 회사의 문예부장으로 있으면서 상당수의 대중가요 가사를 작사했지요. 당시 문예부장은 음반과 관련된 총괄적인 업무를 맡아보던 사람인데요, 오늘날 양현석 씨나 박진영 씨같은 분을 떠올려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이 곡을 작곡한 에르윈은 랄프 에르윈(Ralph Erwin: 1896-1943)으로, 몇 년 전에 해외 인터넷 사이트를 열심히 뒤져서 알게 되었죠.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당대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씨예요. 최승희 씨는 무용가로 시작해서 영화배우, 광고 모델, 가수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연예인(entertainer)이었죠. 게다가 이미 그 시절에 미국의 뉴욕, 샌프란시스코, 프랑스 파리, 이태리, 네덜란드 등에서 공연을 하였으니 이른 시기 한류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비록 일제강점기였고 이시이 바쿠(石井漠)라는 일본 무용수를 통해 무용에 입문했지만 최승희 씨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전통 무용을 익혀 이것을 창작 무용에 응용하기도 했지요. 프랑스 공연 때 최승희 씨가 썼던 초립동 모자는 공연이 끝나고 파리에 유행했다지요.
하지만 일제 말에 일제를 위해 위문 공연을 하는 바람에 광복 후,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 받았어요. 일제 말, 유명 연예인은 일제의 강제 동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요, 최승희 씨도 예외는 아니었죠. 1946년에 남편인 안막(안필승)을 따라 월북한 최승희 씨는 북한에서 다양한 공연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전통악기를 개조하여 개량 악기를 만드는 등 북한 무용계에 큰 공을 세웠어요. 그러나 안막 씨가 숙청당하고 최승희 씨도 세력을 잃었죠. 그 사망 경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최후가 비참했다더군요. 2005년 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