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_DOWN TO EARTH
여름을 떠나 보낸 가을이 겨울에게 부치는 편지
거기 있어, 내가 갈게
Prologue
시와의 첫 앨범 <소요>는 신촌 향음악사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일부 편집 매장에서 발견되기도 했지만 극히 제한된 통로였다. 결국 유통량의 대부분은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이 시와 홀로, 제 몸집만한 기타 메고 공연장을 다니며 직접 사인 판매한 것이었다. 그 정성으로 삼천오백이 넘는 <소요>들이 약속 같은 주인을 찾았다. 피부에 와 닿지 않을지 몰라도, 이는 작은 기적에 가깝다.
옥상달빛, 루싸이트 토끼, 레인보우99, 카프카 등의 소속사인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의 식구가 되면서, 새 앨범 <DOWN TO EARTH>는 전국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음반 쇼핑몰에서 동시 발매된다. <소요> '3세대'와 함께, 11월 29일부터다. 시와의 음악을 아끼고 더 많이 나누고 싶은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Review
<소요>는 지난해 이른 봄에 나왔다. 봄을 닮은, 밝고 따스한 노래 열한 곡이 담겼다. 올해 늦은 가을 찾아온 <DOWN TO EARTH> 또한 이 계절을 닮은, 깊고 서늘한 노래 일곱 곡을 담았다. 이 서늘함은 차가움이 아니라, 지난여름 상기되었던 마음을 차곡차곡 개켜 정리하는 차분함이다. 목소리는 깊어지고 이야기는 내밀해졌다. <소요>가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했다면, <DOWN TO EARTH>는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여름을 떠나보낸 가을이 겨울에게 부치는 편지 같다. 어른스러운 이별 같고 이른 설렘 같다.
시와의 노래를 들으면 'DOWN TO EARTH'라는 말이 떠오른다는 사람이 있었다. 여러 뜻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봄'이라는 의미로서 말이다. 그는 시와가 음악을 맡았던 독립영화 <아메리칸 앨리>의 김동령 감독이었다. 시와는 그 말을 소중히 간직하여 'DOWN TO EARTH'라는 곡을 썼다. 이 노래는 '어느 저녁에 문득 보았네'로 이름을 바꾸어 새 앨범을 여는 음성이 된다.
'어느 저녁에 문득 보았네'는 <소요>와 <DOWN TO EARTH> 사이를 살아낸 시와 자신의 근황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마음에 부침이 많았던 시간을 지나 강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었던 힘은 결국 음악에서 나왔다. 시와무지개 2집 <우리 모두는 혼자> 작업이 그랬다. 그렇게 추스른 마음을 모아 <DOWN TO EARTH>를 엮을 수 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조심스레 부려 놓아, 반성과 전망이 건강하게 대치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의 근황이다. 동시에 한시도 마음 편하게 안녕하기 힘겨웠던 당신에게 건네는 역설적 안부 인사다. 다시 시작이다.
'처음 만든 사랑 노래'는 시와가 정말 처음 만든 사랑 노래다. 조심스레 설레고 떨리는데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왈츠 리듬을, 수줍은 피아노가 반에 반 박자 처진 걸음으로 미행한다. 사랑은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탬버린의 찰랑거림을 핑계 삼아 라라라, 케세라세라, 못이기는 척 시인하고 만다. 사랑스럽다. 모든 당신들의 첫사랑에 바치고 싶은 노래다.
'짐작할 뿐이죠'에서 시와는 당신 때문에 답답해 죽겠다고 짜증을 부린다. 반듯하고 너그러운 <소요>의 이미지에서 한참 삐뚤어진 태도다. 급기야 빈정대고 한숨까지 푹푹 쉰다. 조정치의 능청스러운 기타와 이혜지의 토라진 피아노가 옥신각신할 때, 시와는 키득키득 웃고 콧노래 부르며 강 건너 불구경한다. 시와의 까칠한 매력이라니, 짐작도 못했다.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세상엔 이렇게나 많다.
금세 우리가 알던 시와로 돌아온다. 바닥에 기대어 침대 밑을 보는 진공상태의 눈동자를 선명하게 호출하는 '오래된 사진'은, 시와 음악에 있어 가사의 무게와 회화성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묻고 찾고 삼키고 살고 웃고 약속하고 걷고 달리고, 치장 없는 각운의 반복은 삶 그 자체다. 김태일 감독의 5.18. 광주민주항쟁 다큐멘터리 <오월애>의 오프닝 곡이기도 했다.
'아무도 모른다'는 물에 기대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노래하는데 불을 떠올리게 한다. 둥실 날아오를 때는 아름답지만, 멀어지다 아무도 모르게 스러지고 마는 풍등 같은 노래다. 한편 레인보우99의 일렉트릭 기타는 12월로 넘어갈 무렵의 바람 소리를, 김동률의 드럼은 그 바람에 덜컹이는 유리창틀 소리를 닮았다. 겨울이 익을수록 생각나는 곡이 될 것이다.
긴 말 필요 없다. '크리스마스엔_거기 말고'는 유혹의 노래다. 사람들 넘치는 거기 말고 따뜻한 우리 집에서 그냥 나와 못 다한 얘기나 할까. 그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다른 답을 생각했다면 당신은 너무 어리거나 이미 늙은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헛된 기대와 망상을 부추기는 몹쓸 노래이기도 하다. - 농담이다. 온 나라가 흥청망청하는 시기에 내 좋은 이와 단 둘이 눈 맞추며 조용히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은 의외로 많다. 알고 보면 놀랄 만큼 많을 수도 있다. 연인이 아니라도 좋다. 탐나는 사람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면 된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아닌 거다.
'걱정하지 말아요'의 가사는 시와가 쓰지 않았다. 서울 두리반에서 제주 강정까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사람, 조약골이 어느 새벽 자신의 트위터에 썼다. 시와는 이 글이 섬뜩하도록 아름답게 다가왔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사실. 활동가들처럼 앞서 싸울 수는 없지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공감과 지지의 뜻을 노래로 전하는 것, 이것이 자신이 이 사회의 비상식에 맞서는 방법이라는 것. 그래서 이 노래를 만들고, 제주 강정과 사형제도폐지 기원 콘서트 그리고 희망버스 사진전 등에서 불렀다.
앨범을 다 듣고 나면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느리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능동적이다. 그런 앨범이다, <DOWN TO EARTH>는.
Epilogue
<DOWN TO EARTH>에는 깜짝 선물이 숨어 있다. 큰 기대는 금물이지만 실망도 없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