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음악을 자유자재로 매만지는 그들, 핑크 마티니
‘핑크 마티니 신화’의 신호탄이 된 첫 앨범―[Sympathique]
초저녁 프랑스 시내의 카페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샹송의 분위기가 자욱하다가, 어느새 쿠반 룸바의 리듬이 넘실거리기도 하고, 때때로 지중해의 신선한 저녁공기를 건네주기도 하는 묘한 음반이 여기에 있다. 전 세계 음반업자들의 표적이 되어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발매되었을 정도로 ‘대중음악에 관한 고정된 시선을 바꾸어 놓은 기념비적인 음반’―. 영화의 이미지를 안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언어들이 재즈ㆍ클래식과 함께 룸바와 칼립소, 삼바 등 다채로운 리듬과 어우러진 독특한 음악들. 세상에 나온 지 10년 만에 정식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핑크 마티니의 [Sympathique]는 이렇듯 한 음반에 세상의 모든 음악을 담으려는, 포틀랜드 출신 뮤지션들의 ‘당차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 1997년에 발표된 본작을 시작으로 2004년 작 [Hang on Little Tomato], 그리고 2007년 5월에 발매될 [Hey Eugene!]에 이르기까지 핑크 마티니는 단 3장의 앨범을 녹음했을 뿐이지만 앨범이 거듭될수록 이들이 그리는 세계지도는 점점 넓어져만 간다.
핑크 마티니의 음악을 남들보다 일찍 접할 기회를 가졌던 국내의 부지런한 소수의 음악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불어ㆍ영어ㆍ스페인어ㆍ이탈리아어ㆍ그리스어ㆍ일본어로 된 다양한 언어, 게다가 장르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이 혼재된 이 밴드에 대한 물음표가 수없이 오갔다. 더러는 외국에 나가 이 앨범을 구해온 지인을 통해서, 더러는 컴필래이션 음반에 수록된 단 한 곡 때문에 반하게 되어 이들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했던 것이 사실이다. 자, 전 세계에서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핑크 마티니 3종세트’의 첫 신호탄이 우리 눈앞에 있다. 바로 여기.
클래식-샹송-쿠반 재즈의 유기적 결합체
오케스트라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핑크 마티니의 멤버들은 초기에는 12명으로 시작되었다. 1994년, 클래식의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재즈ㆍ라틴뮤직을 한 곡 한 곡마다 담아내어보자는 의기투합이 발단이 되어 모인 이들은 각자가 오케스트라 활동을 병행하면서 다른 그룹의 공연의 오프닝밴드로 출발했다. 명문 하버드 출신이자 밴드의 핵심인물인 피아니스트 토마스 로더데일은 역시 같은 대학 출신인 차이나 포브스에게 리드 싱어를 맡기고, 자신의 애완견의 이름을 딴 하인즈 레코드를 설립해 1997년, 마침내 본 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편안한 음악’이라는 앨범의 목적처럼 다민족적인 성향이 짙은 멤버들의 개성은 이처럼 샹송에서 아프로 쿠반 스타일을 지나 엔카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손쉽게 오간다. 10대 중반에 ‘코벳 경연대회’에서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던 신동 토머스 로더데일은 이를 계기로 오레곤 심포니와 함께 협연하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때에 만난 지휘자 노먼 레이든과는 할아버지와 손자뻘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또, 트럼보니스트 로버트 테일러, 퍼커셔니스트 데렉 리스와 마틴 자자는 5인조 밴드인 ‘파차만카(Pachamanca : 페루의 전통음식명)’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재즈 스탠더드를 라틴리듬과 접목시킬 새 앨범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Sympathique]는 발매되던 그 해에 핑크 마티니를 ‘최고 신인 아티스트’로 만들었고, ‘Victoires de la Musique'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프랑스에서는 플래티넘을, 그리스ㆍ스위스ㆍ캐나다 내에서는 골드 앨범의 타이틀까지 거머쥔 역작이다. 데뷔이후 핑크 마티니는 유럽과 그리스ㆍ터키ㆍ레바논ㆍ타이완 등 각국의 투어를 비롯해 헐리웃 보울 오케스트라ㆍ내쉬빌 심포니ㆍ잭슨빌 심포니ㆍ오레곤 심포니 등과의 협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미술관에서부터 공항의 적재창고, 왁자지껄한 작은 술집, 거대한 콘서트 홀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공연장소 또한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수록곡들은 발매된 지 10년이 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인기 TV 시리즈물인 “펠리시티”( Felicity), 워너 브라더스사의 드라마 “웨스트 윙”( The West Wing),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카툰 네트워크”( The Cartoon Network) 등 많은 TV 프로그램과 영화에 삽입곡으로 쓰였고 이미 다수의 컴필레이션 앨범에 실려 있기도 하며, 국내 광고와 드라마, 시트콤에서도 자주 등장하여 무척이나 친숙한 느낌을 주고 있다.
문을 여는 첫 곡은 고혹적인 여배우 리타 헤이워드가 주연했던 영화 “길다”(Gilda)의 삽입곡으로 잘 알려진 ‘Amado Mio’. 살짝 비음이 섞여있는 메인 보컬 차이나 포브스의 매력적인 음색과 함께 중저음파트를 가득 메우고도 남을 리듬감을 흩뿌리며 각종 퍼커션이 생성하는 흥겹고 유쾌한 분위기는, 자크 머레이의 곡으로 ‘아트블래키 & 더 아프로 쿠반 보이스’가 연주하기도 했던 ‘No Hay Problema’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토머스 로더데일의 산뜻한 터치를 이어받는 단 파에늘의 멜랑콜리한 기타연주는 화려하다기보다는 깔끔한 톤으로 차분하게 전개되며, 중반부의 퍼커션과 피아노가 주고받는 1분 남짓한 대화는 재치 있는 선택이라 할만하다. 이 분위기는 푸에르토리코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보컬리스트 마누엘 지메네즈의 곡인 6번 트랙 ‘어디에 있는가, 욜란다 Donde Estas, Yolanda?’에서도 고스란히 재생된다. 마누엘 지메네즈는 푸에르토리코 산악지방의 전통음악인 ‘지바로 Jibaro‘와 ‘아프로-푸에르토리칸 스타일’을 대중화시키는 데에 중추역할을 한 인물로, 스페인ㆍ쿠바ㆍ미국을 넘나들며 흡수한 음악들을 융합해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펼친 뮤지션이다. 이 곡 또한 라틴 리듬이 넘실거리는 가운데에 반복되는 코드 내에서 다양한 퍼커션 사운드가 넘실거린다.
다국적 정서를 하나로 묶는 ‘토머스 로더데일 군단’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인 ‘Sympathique’는 모전자제품 CF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곡이다. 1930-40년대의 분위기를 축음기로 돌려 재생시키듯 매우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곡은 차이나 포브스와 토머스 로더데일이 함께 작곡했는데, ‘일하기도 싫고, 점심도 먹기 싫어, 단지 잊고 싶을 뿐… 그래서 담배를 피우지’라는 가사에서 드러나듯 실연에 관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비참함이나 우울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로더데일의 아기자기한 피아노, 존 배거의 묵직한 베이스, 단 파에늘의 기타반주로 이루어진 이 곡은 로맨틱하지만 낙천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핑크 마티니 음악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도리스 데이가 불러 크게 히트했던 ‘Que Sera, Sera’는 많은 영화에 쓰인 곡이다. 보컬인 차이나 포브스가 청아한 목소리로 불러준 핑크 마티니 버전은 영화 “너스 베티”( Nurse Betty)와 맥 라이언이 출연한 “인더컷”( In The Cut)에서도 들을 수 있는데, 불협화음의 빈번한 사용으로 인해 음울하고 비밀스럽고 어두운 공기가 곡 전체를 감싸 안은 이 곡은 특히나 로더데일의 독특한 어레인지가 눈길을 끈다. 깊은 밤 저절로 움직이는 유원지의 놀이기구들, 형형색색의 불빛들 사이로 정령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풍경이 떠오를 만큼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곡은, 하프와 비브라폰의 천진난만하면서도 기괴한 전개로 인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곡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Brazil’은 국내에서는 ‘여인의 음모’라는 다소 황당한 제목으로 출시되었던 테리 길리엄 감독의 명작 “브라질”( Brazil)의 주제곡으로 많은 리메이크 버전을 낳은 곡이다. 도입부는 오리지널 곡의 분위기와 흡사하게 잔잔하게 출발하지만 역시 핑크 마티니는 이 곡에서조차도 분위기를 180도 바꾸는 반전을 잊지 않았다. 포브스의 나직한 보컬이 끝나자마자 흥겨운 간주가 한바탕 이어지고 다시 앞의 파트가 한 번 더 반복되는 구조로, 어린이 합창단의 코러스가 삽입되어 마치 뮤지컬의 한 토막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 킨지 후카사쿠 감독의 1968년 작인 “검은 도마뱀”( Black Lizard)에 삽입된 아키히로 미와의 곡 ‘Song Of The Black Lizard’와 마지막곡 ‘Lullaby'는 역시 포브스의 섬뜩한 허밍이 인상적인 트랙이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함께 그리스 국민작곡가로 추앙받는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곡인 ‘Children Of Piraeus’는 줄스 다신 감독의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의 주제곡. 원곡은 빠르고 경쾌하며, 조금은 경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악센트가 도드라지는 발랄한 분위기이지만, 본 앨범에서의 이 곡은 4번 트랙 ‘Que Sera, Sera'와 마찬가지로 우울하고 음침한 핏빛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녀의 숨소리와 나직한 그리스어의 읊조림은 듣는 이를 숨죽이게 만드는 묘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간혹 주술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던 로더데일의 어린 시절의 한 토막을 보여주듯 쇼팽의 ‘Andante Spianato & Grande Polonaise Brillante (Op.22)’의 일부를 차용한 인트로로 출발하는 ‘La Soledad’는 핑크 마티니의 또 다른 보컬인 페페 라파엘과 토머스 로더데일이 함께 작곡한 곡이다. 룸바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했던 쿠바음악의 거장인 에르네스투 레쿠오나의 명곡 ‘Andalucia’에서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산뜻하고 가벼운 터치와 섬세하게 그려내는 멜로디라인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연주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대중성과 음악적 완성도’―.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음반이라는 건, 모든 뮤지션들의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부담 없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지만, 결코 쉽게 만들지 않은 음악. 이제야 우리는 단순히 유러피언 스타일과 라틴 뮤직이라는 대륙간 만남이 아니라 오랜 기간 클래식 안에서 자신을 숙성시킨 피아니스트 토머스 로더데일을 주축으로 한,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해온 열명 남짓한 ‘고수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본작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앨범을 기다렸던 시간들을 모두 잊게 해주는, ‘시간과 노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음악들을 만나는 그런 특별한 경험을 말이다.
-박경 / 음악 칼럼니스트-
2007년 4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