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파리의 휴일
느린 걸음의 여행자를 위한 음악 다이어리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청량하게 채워줄 BGM
모던 감성 듀오 벨 에포크가 들려주는 일상의 조각들
Belle Epoque
2005년 조용히 등장했지만 리스너들에게 크게 자리잡은 투명한 이름, ‘미스티 블루’. ‘벨 에포크’는 바로그 미스티 블루의 사운드메이커 ‘최경훈’이 싱어/송라이터 ‘조은아’를 만나서 결성한 듀오이다. 국내 최초의 카툰 사운드트랙 ‘CRACKER’에 수록된 곡 ‘May’가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 삽입되면서 대중의 호기심을 증폭시켜왔던 터라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이번 정규 앨범 ‘일요일들’ 에 쏟아 왔다.
누구나 꿈꿔보았던, 그리고 여전히 꿈꾸고 있는 것은 아주 소박한 환상이다. 동화적 현실, 현실적 동화. 서랍 속에, 호주머니 속에 아무렇지 않게 숨어 있는 일상 속의 환상을 벨 에포크는 살며시 끄집어낸다.여린 멜로디로 이루어진 곡들은 소극적인 듯하지만 가랑비처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마음을 적시고는 오히려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강렬한 환상을 추억처럼 새겨놓는다.
히치하이킹도 없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마음 여린 우리들을 위한 안내서
앨범을 여는 곡 ‘뷰파인더 세상’은 카메라의 셔터음으로 시작된다. 몽환적인 전자음의 차가운 울림에 느긋하게 반복되는 기타 연주와 속삭이는 듯 포근한 보컬이 따스함을 불어넣는다. 카메라를 들고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 한조각 여유와 가슴 떨림이 교차하는 그 작고도 소중한 감정을 담아 어른이면서도 아이 같은 자신을 노래하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에서 만나는 소소한 순간들처럼 다가오는 트랙들이 사랑스럽다. 타이틀곡 ‘Vacation’은 넓은 챙이 달린 하얀 모자를 쓴 소녀의 원피스 자락을 흔드는 바람처럼 상쾌하게 다가와서 지쳐 있던 우리를 간질여 떠나고 싶게 하는 곡이다. 언젠가 보았던 순정 SF 애니메이션 속 그림의 가늘고 아름다운 선을 그려내는 듯한 ‘별의 속삭임’이나, 파스텔 나른한 햇살을 한껏 머금은 노천 카페에서 마시는 적당히 달달한 애플소다 같은 ‘cafe Siesta (feat. e.p ho)’ 역시 강한 자극이 아닌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바다 건너 어딘가로 초대한다.
모든 곡들은 부드럽게 스며들지만, 벨 에포크의 음악은 단지 발랄하고 명랑한 어린아이 같은 달콤함의 멜로디를 전하는 것이 아니며, 쌉쌀함을 동반하는 초콜렛의 달콤함처럼 그 속에는 언제나 잔잔한 쓸쓸함이 깔려 있다.
마이너한 감성이 가득한 멜로디와 가사가 흔들리는 사춘기 소녀의 모습처럼 스러질 듯 아연하게 다가오는 ‘5월의 후유증’, 그믐달의 기운을 받은 듯한 멜로디의 건반 연주가 인상적인 ’달에 숨다’ 에서는 그러한 쓸쓸함의 정서가 강하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 없이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트랙 ‘계절의 끝’에는 모짜르트의 레퀴엠 중 Introitus의 소프라노 부분을 샘플링하였는데, 슬픔을 고조시키기보다는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듯한 분위기는 벨 에포크 음악의 전반적인 이미지와 잘 들어맞는다.
마디 마디에 자그마한 숨결이 느껴지는 듯 조심스러운 조은아의 보컬은 매끄럽고 트랜디한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순간의 감정을 전달하려는 듯한 최경훈의 센치한 감성을 가장 적절한 형태로 전하고 있다. 이 둘이 만들어내는 느낌은 마치 파리의 어딘가를 사뿐한 발걸음으로 거니는 어린 소녀의 자그마한 구두처럼 소박하면서도 귀족적인 판타지로 듣는 이를 안내한다.
혼자 떠나는 아름다운 시절로의 여행
하나의 요소를 강조하기보다는 색색깔의 작은 조각이 모여 만들어내는 모자이크처럼 자연스럽고 모난 데 없는 음악. 그 느낌은 곡에서는 물론이고 음반 전체의 구성에도 흐르고 있다. 최경훈의 또 다른 모습 ‘미스티 블루’의 음악이 그러했듯 벨 에포크 역시 한 번의 스킵도 없이 전 곡을 오랫동안 듣게 만드는 잔잔한 힘을 가지고 있다.
벨 에포크(Belle Epoque)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파리가 가지고 있는 도시적인 느낌보다는 그 안의 낭만에 더욱 매료된 듯한 벨 에포크가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시절, 그 안으로 조금 이른 바캉스를 떠나 보자. 홀로 떠나는 바캉스의 로맨틱한 외로움, 본작은 지쳐 있는 우리의 일상에 그러한 달콤쌉싸름한 향기를 더해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