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1집 복각판에 부쳐
무릇 모든 추억에는 일정 정도의 감상적 미화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다소간의 치기와 서툴고 덜 다듬어진 몸짓까지도 추억의 울타리에서는 아름답다. 그것이 여러가지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1979년 여름, 메아리의 골수들은 우리의 노래들을 테이프에 담아 보급해보자는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김민기 선배의 '공장의 불빛'이 이른바 불법 테이프의 놀라운 가능성을 일깨워준지 불과 몇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로서는 여러모로 위험천만한 작업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가진 것이 라곤 맨몸뚱아리와 젊은 열정, 그리고 기타 몇대가 전부이던 우리에게 그것은 매우 무모한 시도였 음에 틀림없다. 노래와 반주야 늘 하던 식으로 몸으로 때운다 하더라도 우선 녹음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명색이 상업적(?) 보급을 위한 첫 출발인데 써클룸에서 카세트 레코더로 녹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 내가 봉천동의 한 카페를 추천했다. 그보다 얼마전 우연히 '라이브 가수 구함, 대학생 우대'라는 광고가 붙은 것을 보고 아르바이트나 해 볼까 싶어 김현민(경영78)과 함께 오디 션을 받은 적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오디션에는 합격을 했지만 노동 조건이 너무 형편없어서 아르 바이트는 포기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열악한 녹음실이었지만 당시 우리 는 그저 릴 녹음기에다 에코 효과를 빵빵 넣어가면 녹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했 었다. 이 까페의 정기휴일을 빌어 녹음을 했다. 16곡의 레퍼토리를 녹음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한나절이 걸렸다. 우리가 가진 악기라고는 기타와 하모니카가 전부였고 모자라는 부분은 코러스 로 메웠다. 기타 반주는 김현민(경영78), 문승현(정치78), 이영웅(경영78), 하모니카는 양현수(정 치77) 동문이 맡았다. 글쎄, 내 생각으로는 메아리 역사상 최고의 라인업이 아니었나 싶다.
메아리 1집은 당시 대학가에서 알음알음으로 잘 팔려 나갔고 불법복제(?)도 난무했다. 물론 당시 우리의 입장은 '불법무단 복제를 환영합니다'였다. 메아리 1집에 실린 레퍼토리들은 다소 소박한 차원에서 나마 이제 막 현실의 깊이와 무게에 눈떠가던 우리들 젊은 날의 고뇌와 인식을 보여준다. 이후 오 랜 세월이 흘렀고 이 노래들 가운데 상당수가 나중에 합법 음반의 형식으로 리메이크되었지만 아직 도 나는 우리들 젊은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테이프의 감동적 울림을 잊지 못한다.
(김창남, 78학번, 문화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