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소리 심청가 완창음반을 출반하며
정회석 본인은 1963년 전남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714번지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송계 정응민(1896-1964)이고, 부친은 정권진(1927-1986)이다. 조부 정응민은 종증조부 정재근(1853-1914)을 통해 박유전의 소리를 전승했다. 영천리 조부의 집에는 고수 김명환 선생과 김연수․조상현․성우향․성창순․박춘성․안채봉․안향련 등 여러 명창들이 와서 공부를 하였고, 집안 대소사는 대부분 판소리와 관련되어 있었다.
본인은 판소리 입문 시기가 따로 없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늘 부친의 소리를 듣고 흉내 내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에 출전하여 신인부 3등을 수상한 적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제1회 전국판소리경연대회(한국일보사 주최, 1976)에서 신인부 1등을 수상을 하였는데, 이때 부친께서는 혼자서 연습을 하는 본인을 불러 소리의 진정성을 강조하면서, ‘심청가를 잘 하려면 효도를 해라.’고만 하셨다. 1977년 제4회 춘향제 전국명창대회 신인부 1등을 한 다음부터 부친은 본격적인 판소리 학습을 허락하였다. 조부께서도 부친이 스스로 소리를 깨우쳐서 재능을 보이기 전까지는 소리를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판소리는 집안의 가업이므로 본인은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 서울 석관동 집에는 고수 김명환 선생, 박봉술․한승호 명창 등 부친과 교분이 두터운 어른들이 무시로 출입하면서 소리를 하셨는데, 흥취가 오르면 평소에는 듣도 보도 못한 고제 소리를 하셔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소리판은 판소리의 다양성과 깊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깊은 판소리 담론과 더불어 무대 공연과는 또 다른 판소리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틀에 박힌 소리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변화시켜 판을 짜는 솜씨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으며, 본인의 판소리 관을 형성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본인은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가곡을 배웠고, 서울대학교 국악과에도 대금 전공으로 진학을 하였다. 당시에는 판소리 전공이 없어서 가곡과 대금 전공으로 진학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본인의 판소리 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당시 제도권 교육에서는 판소리가 소외되어 있었으므로 대학에서도 판소리 고법 강좌가 없어서 김명환 선생께 따로 고법을 배웠다. 대학 재학 중에는 전국국악대회(1985)에서 전공부 성악 1등을 수상하여 예능특기자로 병역을 면제 받기도 했다.
본인은 부친으로부터 보성소리 4바탕을 배웠다. 보성소리는 춘향가(김세종 제), 심청가(박유전 제)는 많은 사람이 부르지만, 수궁가와 적벽가는 전승한 사람은 많지 않다. 보성소리는 전체가 하나의 작품군이므로 수궁가와 적벽가를 전승하는 일도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부친 정권진 명창께서는 강산제 심청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였는데, 이 소리는 정재근(종증조부)-정응민(조부)-정권진(부)-정회석(본인)로 이어지는 소리이다. 현행 바디 중 한 가계의 소리로 4대에 걸쳐 정확한 계보를 지니면서 전승된 것으로는 보성소리 심청가가 유일하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보성소리를 배웠지만, 당시에는 무형문화재 전승제도가 판소리의 전승과 확산에 초점이 있었으므로 직계 자손보다는 가능한 외부 제자들을 우선적으로 전수와 이수를 받게 하였고, 선친께서 요즈음 연세로는 일찍(1986년, 59세) 작고하시는 바람에 직접 선친으로부터 이수증을 받지 못하였다. 2000년에는 전국판소리 명창 경연대회(남원춘향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선친이 작고한 후, 2002년 성우향 명창이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자 본인은 성우향 명창에게 이수를 마쳤다. 성우향 명창은 본래 정응민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므로 집안의 소리를 존중해서 본인에게도 늘 ‘조부와 부친의 소리를 그대로 잘 지켜 부르라.’고 하였다.
보성소리는 두 계열이 있는데, 심청가․수궁가․적벽가는 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정회석으로 전승된 것이고, 춘향가는 김세종-김찬업-정응민-정권진-정회석으로 전승된 것이다. 박유전과 김세종의 소리는 정응민에 이르러 통합되어 현행 보성소리를 형성하였으며,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동백 제 소리가 일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고도 한다. 보성소리는 정응민 명창 이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면서 개인적인 성향이나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약간씩 다른 색깔을 띠게 되었는데, 판소리 연구자들은 ‘정권진의 소리가 옛소리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보성소리를 중흥시킨 조부 정응민 명창의 소리는 현재 녹음이 극히 일부(단가 녹음방초와 수궁가 약성가 등)만 남아 있어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본인은 박사학위 논문 『정응민 가계 <수궁가>의 음악적 특징과 전승양상』(한양대학교 대학원, 2014)을 통해 집안에서 전해오는 『수궁가』(1935), 『심청가』(1935, 1936), 『춘향가』(1936) 창본을 분석하여 조부의 소리와 현재 전승되는 보성소리와의 전승 관계를 밝힌 바 있다. 이를 통해 조부의 소리가 부친을 통해 정확히 전승되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보성소리는 심청가와 춘향가는 정권진․조상현․성우향․성창순 등 훌륭한 명창들이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기 때문에 활발하게 전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이 전승하다 보니 개인적인 역량이나 편차가 심하게 나타나서 도리어 그 정체성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판소리가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성소리가 추구하는 소리의 본질을 벗어난다면 보성소리로서의 의미는 퇴색하게 마련이다.
선친께서는 늘 ‘정심정음(正心正音)’을 강조하셨는데, 보성소리의 본령은 소리의 법도와 성음에 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음가짐을 바르고 굳게 가지라는 말이다. 현재 불리는 보성소리 중 상당수는 과도하게 계면성음을 쓰는 경향이 있는데, 정음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또한 세부적인 표현에 집착하여 보성소리라는 큰 틀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여러 종류의 무형문화재 지정 바디를 학습하다가 유파가 뒤섞여 보성소리의 특징을 잃어가는 경향도 우려스런 일이다.
본인은 선친의 무형문화재 지정 바디인 강산제(박유전 제) 심청가를 전승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업인 보성소리 4바탕 전체를 이어가야 할 임무도 있다. 아울러 1970~1980년대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보유자들께서 작고한 이후 보성소리 3, 4세대 전승자들의 소리가 빠른 속도로 변화해가는 데 대한 우려가 있다. 시대적인 변화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염려가 된다. 1960년대가 일제강점기 이후 전승이 단절된 판소리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소리정신을 다시 세우는 것이 시대적인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로서 그 막중한 소명의 길을 열과 성을 다해 나아가 보성소리, 200년을 유구히 내려오는 소리의 법통을 올곧게 지켜나가는 계승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 그리할 때 명가의 소리는 끊임없이 빛을 발할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이 사회와 후학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본 음반을 출반하고자 한다.
2023. 봄날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정 회 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