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에 뜻을 두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동안에 애환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마는 나 나름의 감개가 무량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국악은 사랑과 종교입니다. 가야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 모든 번거로움이 사라지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는 기분을 느낍니다.
나는 우리 가락에 취하여 있고, 내일도 취하고 싶습니다.
한세상 보람 있는 예술인으로서의 생애를 가지려고 목이 터지도록 창을 했고, 손끝이 닳도록 가야금을 탔습니다. 겨레와 함께 웃고, 울고자 후학들을 길러 국악의 전통을 이으려고 발을 벗고 나서도 보았습니다.
조상의 얼이 맺혀있는 국악을 민족의 마음속에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내가 좋아하는 국악 속에서 살려고 힘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국악을 알만하게 되니 몸이 안 따라 줍니다.
예(藝)에 산다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예를 도로 터득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지에 가고 싶었습니다.
내가 좋아 택한 국악이었지만 배우기에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쉽게 배우고 고유의 가락을 익힐 수가 없을까 해서 틈틈이 작곡과 편곡에도 손을 대 보았습니다. 그래야만 새 시대의 사람들이 배울 수가 있고, 후세에 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차츰 마무리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고 힘을 주어서 불렀던 창들은 흘러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기 활자로 박아 놓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국악인으로 걸어온 나의 발자취입니다.
이제까지 많은 선배, 동료 국악인들의 따듯한 도움을 받았고 많은 분의 성원도 받았습니다.
어려운 국악의 길을 걸어가는 후학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향사 박귀희(1921.2.6.~1993.7.14.)의 자서 中
향사의 사계(四季)
근현대 국악사는 신민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신민요는 작곡자와 작사자가 존재하는 잡가·민요풍의 곡이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오랫동안 전승되던 민요의 선율과 장단으로 이루어졌기에 아픈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의 애환을 웃음과 눈물로 달랬다.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던 신민요의 힘은 21세기의 서의철 가단에게도 전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대중들과 단절되었을까?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이 언제 나뉘었을까?
지금처럼 다양한 음악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기에 우리 음악은 생명력이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불린 선율과 장단을 담은 신민요는 위 고민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리고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현대인들을 위로하려는 서의철 가단이 찾던 음악이었다.
서의철 가단은 신민요를 공부하며 박귀희 선생님을 회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금병창의 전승에 큰 공헌을 하신 박귀희 선생님께서는 경기, 서도민요와 당시 유행하던 가요까지 남도민요처럼 새롭게 편곡하여 부르셨고, 이 신민요들이 악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노래로 전해지게 되었다. 대중들에게 국악을 다시 찾아 준 것이다.
서의철 가단은 악보 속 신민요를 많은 사람이 즐기는 음악으로 돌려주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향사 박귀희 선생님의 103주년 탄생일이다.
서의철 가단은 선생님을 기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께서 남기신 명곡들을 새롭게 편곡한 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맞춰 선생님을 기리고자 한다.
생전사후 국악의 앞날과 후진양성에 힘쓰신 향사 박귀희 선생님.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존경합니다.
1. 향사의 봄 (<내 고향의 봄>, <봄노래>)
작곡: 박귀희, 작사: 임일남, 박귀희
소리: 서의철, 아쟁: 남성훈, 철가야금: 오은수, 해금: 소윤선, 장구: 김명준
봄은 새로움, 시작의 계절이자 모든 것이 자라고 피어나는 시기이다. 노래 속 향사의 봄도 마찬가지이다. <내 고향의 봄>과 <봄노래> 부르면 왠지 설레고, 절로 밝은 분위기가 피어난다.
<내 고향의 봄>은 창작민요 연구 당시 옛 노래에 새롭게 편곡한 곡이다. 새봄을 맞이하는 시골의 정경, 대자연의 미풍이 스며드는 듯한 내용이 흥겨운 장단에 맞춰 펼쳐진다.
<봄노래>는 빠른 장단과 다양한 말 붙임으로 봄의 흥취를 노래하는 곡이다. 이 곡의 경쾌하고 밝은 선율은 듣기만 해도 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매력을 지닌다.
2. 향사의 여름 (<발림>, <김매기 노래>)
작곡: 박귀희. 작사: 이병우, 박귀희
소리: 서의철, 아쟁: 남성훈, 철가야금: 오은수, 피리: 남정훈, 장구: 김명준
우리에게는 여름이 피서의 계절이지만, 농사로 땀을 흘리거나, 적막한 밤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향사의 여름은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발림>은 우수가 감도는 한적한 여름밤, 독수공방 홀로 임을 그리는 애환이 담긴 곡이다. 이 신민요 역시 박귀희 명창이 새롭게 편곡한 작품이다.
<김매기 노래>는 이병우의 시에 박귀희 명창의 가락을 얹은 작품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김을 매는 정경이 담겨 있다.
3. 향사의 가을 (<애수의 가을밤>, <풍년노래>)
작곡: 박귀희, 작사: 이병우
소리: 서의철, 아쟁: 남성훈, 철가야금: 오은수, 대금: 유석균, 장구, 꽹과리: 김명준
선생님께서는 가을과 관련된 신민요를 많이 지으셨다. 아마 한가위의 풍요로움, 이와 대조되는 계절의 적막함을 노래에 담아내려고 하신 것 같다. 이 음반에서는 서로 느낌이 다른 두 곡을 선정하여 다양한 향사의 가을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애수의 가을밤>은 쓸쓸한 가을의 운치가 담긴 곡이다. 중간부터 등장하는 계면조 가락은 얼굴에 눈물이 선을 긋는다는 그 이름처럼 이 곡의 처량함을 더한다.
<풍년노래>는 경쾌하며 활기차고, 한편으로는 화평한 느낌의 신민요이다. 가을을 맞은 김제, 만경 들녘의 황금물결처럼 밝은 가락은 근심을 잊게 해 주고,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는 고향의 풍요로웠던 한가위를 떠올리게 해 준다.
4. 향사의 겨울 (<님 그린 회포>, <범벅타령>)
작곡: 박귀희, 작사: 박귀희
소리: 서의철, 아쟁: 남성훈, 철가야금: 오은수, 거문고: 강균임, 장구: 김명준
겨울은 춥다. 추운만큼 한해를 되돌아보며 다시 돌아올 새해를 준비하게 된다. 향사의 겨울도 마찬가지이다.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이 바빠!’ 향사 선생님의 자서전 제목처럼 또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려본다.
<님 그린 회포>는 회포를 바다에 둥실 띄워본 애절한 감정을 담은 노래이다. 박귀희 명창의 많은 신민요들이 남도민요에 가까운 점과 대조적으로, 이 곡은 경기민요의 음악적 특징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범벅타령>은 맛난 음식인 범벅을 열두 달에 맞춰 종류별로 언급하고 이어서 특색 있는 세시풍속을 노래하는 곡이다. 노래 가사도 독특하고 재미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판소리 가사들이 가끔 등장하면서 음악의 재미를 더한다
5. 향사 그리고 또다시 봄 (<야월삼경>, <상사천리봉>, <복사꽃 필 때>, <꽃타령>)
작곡: 박귀희, 작사: 박헌봉, 홍윤식, 이병우, 박귀희
소리: 서의철, 아쟁: 남성훈, 철가야금: 오은수, 거문고: 강균임, 대금: 유석균, 피리: 남정훈, 해금: 소윤선, 장구: 김명준
위의 네 곡은 서의철 가단이 처음 마주했던 향사 선생님의 신민요이다. 한 해를 시작한 봄이 다시 돌아와 그 다음 해를 시작하듯, 가단을 만들고 공연을 준비했던 초심을 상기시키기 위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이 연곡으로, 그리고 다시 봄으로 이 음반을 마친다.
<야월삼경>은 예로부터 전하던 곡을 가야금에 맞도록 편곡한 신민요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심경이 잘 표현된 가사와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선율로 구성되어 지금도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노래로 불리고 있다.
<상사천리봉>은 이병우 선생님과의 노력이 담긴 작품이다. 남도민요의 창법과 선율을 통해 임을 그리며 잠 못 이루는 여인의 심경이 더욱 애절하고 깊게 그려진다.
<복사꽃 필 때>는 일명 <복숭아꽃>으로도 불리는 곡이다. 순박한 처녀의 마음을 향취 그윽한 꽃 중 복숭아꽃에 비유하여 고전적이면서도 순정 가득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꽃타령>은 각양각색의 꽃들을 노래하는 곡으로, 여러 후배 명창들에 의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졌다. 일관적인 남도민요 창법 아래에서 다양하게 바뀌는 악조를 통해 그 이름처럼 화려하고 매혹적인 선율이 피어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