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언,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김도언의 첫 번째 앨범『Damage』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물음은 ‘폭력’과 ‘무구함’의 사이를 걷는 일로부터 떠오른다. 그가 내게 앨범의 라이너노트를 부탁하며 이어령의 동시 「활이 아니라 하프가 되거라」를 보여주었을 때, 우리는 어떤 폭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불어 하프라는 악기가 활이라는 무기에서 유래한 것처럼, 이 앨범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특정한 순진무구함에서 기인한다 전했다.
나는 가만히 옛집 근처의 미용실을 떠올렸다. 그곳에 위치한 작은 화단에는 여름마다 붉은색 사루비아가 가득했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낯선 개미들의 낙원. 때때로 나의 친구들은 그곳에 앉아 개미들을 죽이는 일에 열중했는데, 어떤 아이도 그들의 작은 세계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언제나 낙원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때가 되면 찾아와 세계를 어루만지는 겨울의 몸이었다. 온 세상을 토닥이는 겨울의 자장가가 끝나면, 사루비아의 꽃대 위에는 다시금 붉은 빛깔이 화마처럼 번져갔다. 그때, 화단의 개미들은 자신의 집에 사이다를 들이붓는 우리의 손을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었을 테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걷고, 달리고, 웃었을 것이다. 그렇기에『Damage』가 남긴 질문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Damage』는 일종의 ‘게임 음악’을 연상시킨다. 앨범의 수록곡을 감상한 많은 이들이 콘솔 게임의 배경음악 일반을 떠올렸다. 그러나 김도언은 게임 문화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이 감수성의 출처에 대해 흥미로워 하는 중이었다. 그조차 의문스럽게 여기는 이 감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세기 말 최초의 전자 악기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1920년대에 테레민이 보급될 때까지, 전자신호가 만들어내는 음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이 낯선 음률의 세계는 시각매체의 역사와 매우 가까웠다. 소비에트 연방의 SF영화 《Cosmic Voyage》(1936)는 이미 무성영화 시기에도 전자음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사용한 전자 음악은 우주의 낯선 풍경을 묘사하는 영화 제작자들의 열망에 적절하게 반응했다. 무성 영화의 시대 이후, 이미지와 음향이 분리 불가능한 것이 되자, 전자음향은 SF 장르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핵심요소가 되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미래’는 인류 공통의 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그런 꿈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점차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예지몽에 대한 Deja-vu를 호소했다. 이제 꿈은 대낮에도 깰 수 없게 되었다.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1970년대의 게임 업계를 살펴보자. 당시 게임 업계는 녹음방식이 아니라 게임 조작에 따라 직접 음향을 구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런 방식은 게임기기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으나, 악기의 소리를 재현할 수 있는 사운드 모듈은 아니었다. 모든 효과음과 배경음은 기기에 장착된 Beep and boop 사운드를 통해 송출되었다. 즉, 게임기 자체가 전자간섭을 통해 특정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악기였던 것이다. 검은 화면 속 작은 공이 벽에 부딪힐 때, 이질적인 전자음이 짧게 울린다. 공이 ‘그런’ 소리를 낸다는 사실은 담요 안에 숨어 노는 아이들의 플라스틱 칼처럼 우리에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물론 악기를 통해 자연의 소리를 재현하는 일은 음악가들에게 있어 여전히 숙명과도 같은 문제이다. 김도언의 음악 중 일부도 자연현상을 그 제목으로 한다. ‘청명 (淸 明)’이나 ‘Waver‘, ‘늪’이 내포한 이미지는 쾌청을 나타내는 소리의 오르내림, 유체의 움직임을 연상할 수 있는 균일한 박자나 음계의 뒤얽힘을 통해 나타난다. 허나 파도와 흙과 구름은 ‘그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러한 ‘꿈의 영토’는 20세기 이후부터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펼쳐졌다. 이제 우리들은 가본 적 없는 오늘을 서술하는 예언자의 얼굴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낮에도 꿈속을 거닌다. 도래할 꿈이 현재이므로 미래는 없다. 미래가 없는 만큼 지나간 일도 없는 일. 우리는 계속 지금을 본다. 김도언의 음악이 우리에게 특정한 형태와 변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게임 속 풍경처럼 실재와 철저히 분리된 세계의 향기를 포함하는 것은 켜켜이 중첩된 현실과 관련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모습을 바꾸는 요정들”을 알고 있다.
2021년 말, 우리는 작업실에 있는 장난감 총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 물건이 이상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일은 『Damage』가 내포하는 질문과 멀지않다. 장난감 총의 형상은 총의 그것과 똑같지만, 누구도 거기에서 금속제 탄환이 발사되는 일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현요한 빛과 소리로 번쩍이며 소유자를 기쁘게 할 뿐이다. 누군가는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하겠지만, 아니 이미 많은 사람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어떻게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Damage』는 요새 앞에서 외쳐야하는 암호보다는 고개를 기울인 채 중얼거리는 김도언의 질문이다. 그의 음악은 세계의 질문이 모이는 회랑에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하프가 보여주는 문제는 하프가 되어야만 하는 우리의 원죄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프는 종종 그 울림을 통해 우리에게 ‘활’을 각인시킨다. 하프의 연주를 듣는 이들은 활의 꿈을 꾸고 있다. 화단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거인의 꿈을 살고 있다. 역시나 찾아온 겨울이 이번에는 개미굴처럼 따듯한 아이들의 집을 수장시키며 묻는다. 당신은 어떤 아이인지, 혹은 개미인지. 허나 사루비아로 가득한 세계에 서 있는 당신은 개미의 꿈 안에, 어쩌면 인간의 꿈을 꾸는 개미 안에 있다. 꿈은 우리를 꾸고 있다.
-임다울 (미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