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로 편지가 갑니다 나의 꽃이여
편지를 끝까지 읽으신다면
제가 쓴 것을 보고
거기서도 웃을 것입니다“
아니세토 데 아스카수비 (Aniceto de Askasubi)
그런 때가 있다.
말이 진심의 반경을 담지 못해 진심의 형체가 자꾸 서늘해지는 순간.
말의 귀퉁이를 당겨 맞출 것인지, 진심의 폭을 말에 맞춰 줄일 것인지
누구나 눕게 되는 마음속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것이 바로 이 노래에 담긴 Astro Bits의 질문이자 우리의 문제다.
2011년 정규 앨범 [Bits of universe]을 공개했던 그의 앨범 인트로덕션(Introduction)은 그랬다. '개인은 우주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인들의 ‘우주성’은 상호 관계하는 한 결코 개별적이지 않다. Astro Bits의 이번 앨범에는 그가 여행하며 만났던 개개의 우주와 그들이 충돌하거나 어울리며 만들어 내는 ‘사이’ 그리고 ‘찰나’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전 12곡으로 구성된 앨범 소개는 이러한 문장으로 종결된다.
이것으로 Astro Bits의 여행기가 마무리된다. 이전의 그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배낭 가득 넣어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의 그는 이전보다 가벼워 보인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깊이가 더해질수록 가벼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어지기 위해 무거울 필요는 없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침울해질 필요도 없다. 가벼움의 힘은 무거움과 단절할 줄 아는 힘이다. 가벼움이 가벼울 때 무거움도 깊어진다.’ (베르트랑 베르줄리)
어떻게라도 좋으니 음악을 들어달라던 그는 사람들 사이의 우주를 유영하는 여행자의 모습이었다가 2020년 우리 앞에 '나를 듣기 위해 나를 들어서는 안 되고, 나를 들리도록 내주어야 합니다'라는 블랑쇼의 언어로 멈춰 선다.
음악은 카오스 그 자체다. 모든 것이 언발란스하며 앞과 뒤, 전과 후이기도 하고 이전과 이후다. 정확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장르이거나 시간의 함축이다. 그 흐린 것들 사이로 Astro bits, 그의 목소리가 고장 난 무전기 속 구조 신호처럼 흘러나온다. 분명한 것은 그뿐이다. 하지만 모든 진심이 그러하듯 말은 형용의 교란으로 선명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들었던 것만을 들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너무 오래된 말이자 이전의 말이며 또는 현재형이자 그의 안에서 기다림을 잃은 말들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가깝지만 멀고, 선명해야 하지만 선명해질 수가 없다. 그리고 등장하는 기타 솔로는 밀물처럼 그러한 말의 공백을 채운다. 말은 점차 선명해지지만 반주의 형태를 가진 진심이 말의 영역을 덮고 주춤하던 말이 다시 앞서는 형태가 반복 진행된다.
이 곡 내내 그의 방백은 대화가 아니다. 그는 누군가를 향해 말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말한다. 그래야만 그의 고백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듣는 자가 없으나 듣는 자가 있는 역설, 음악은 시작부터 끝까지 있음과 없음, 가까움과 멀어짐, 과거형과 현재형의 균형추를 어지럽힌다. 당신은 거기에 있는가? 물론이다. 우리는 누구나 말할 수 없는 진심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한다. 블랑쇼의 말처럼 기다림 속에서 모든 말은 느려지고 고독해진다. 또한 스스로 발설과 비발설의 모순을 품는다.
노래가 끝난 이후에도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Astro bits는 이것을 '초행'이라 이름 붙였다. 모든 룰의 관망자 같았던 그가 마주친 최초의 역설과 모순. 그의 이전 앨범들은 자신의 바깥을 유영하던 그가 무엇에 이르기까지의 방랑기일 것이다. 그는 머무를 줄 몰랐고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 머물러 있는 그는 우리의 착각이 아니다.
말하기 원하지만 말하지 못하면서, 말하기 원하지 않지만 말을 피해가지 못하면서, 말하면서, 말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원하면서, 말하지 못하면서. (모리스 블랑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