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날 것을 듣는다. 정형근의 노래들.
노래는 개인의 산물이면서 시대의 산물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유행에 들어맞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노래하는 이가 꿈꾸는 다른 시대의 감성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것을 유행에 뒤처졌다거나 앞선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살짝 서로 어긋났다고 하는 것이 요즘은 더 맘에 든다. 트렌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너무 빠르며, 이젠 그 소멸의 속도를 한 개인이 극복하기엔 참 힘들고 때론 무의미하다고까지 느껴지니 말이다. 그래서 한 뮤지션이 사랑받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감사할 일이며,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도 역시 고마운 일이다.
직업상 음악을 늘 찾아서 듣지만 가끔은 내게 다가오는 음악들 사이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그 무엇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의 기쁨은 정말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리고 감사하다. 오래전... 20년 전쯤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고, 그 기쁨을 준 이는 뮤지션 정형근이다.
천오백 원 아끼려고 집에서 머릴 감았다
임신한 아내가 무엇을 먹고 싶다고 한다
두부와 콩비지를 사오라고 한다
시장 입구에 섰다
사진 전시회에 온 것 같았다
쑥갓 더덕 파는 할머니한테 섰다
저 파란 것들을 먹으면
내 마음이 파랗게 될까
천 오백원 아끼려고 집에서 머릴 감았다
난 공해다
40억 년 후에 목욕비는 얼마나 될까
- 정형근, 40억 년 후
그의 새 노래를 소개하는 이 글에 큰 공간을 할애해 이 가사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날 내가 받았던 기쁨과 충격을 다시 기억하고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노랫말로 곡을 쓰고 부르다니. 시라고 할 수 있는 이 강렬한 문장을 담담하고 아름다운 재즈피아노 선율 위에 읊어 간 이 곡을 들었던 그 순간은 참으로 오랜 시간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가 이번에 발표한 앨범은, 기존의 노래들 중에 7곡을 골라 새로운 편곡으로 마무리하고 최근작인 [김치]와 새로운 곡 [아내의 빨간 발바닥]을 넣어 총 9곡을 담고 있다. 전작 [김치] 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소백하게 담아낸 작품이라면 이 번 신곡 [아내의 빨간 발바닥] 은 오랜 시간 힘든 노동의 시간을 뒤로하고 은퇴한 아내를 위해 만들고 부른 곡이다. 전작에 이어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송시인 것이다.
힘들었지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퉁퉁 부은 종아리와 물집 잡힌 빨간 발바닥 주무르면서
사랑해요 당신의 발바닥
사실 정형근은 위에서 소개한 [40억 년 후]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강렬한 시어를 사용해 노랫말을 완성하기도 했었는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최근의 곡들에서는 마치 툇마루에 앉아 어제저녁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듯이, 일상의 언어로만 그것도 별다른 수식어 없이 물 흐르듯 풀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제목과도, 그의 목소리와도 심지어 불안하게 들리는 그의 음정들과도 완벽하게 어울린다.
음악을 만드는 방식이 많이 변화하여 이젠 손 악기와 목소리만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은 사실 매우 힘들어졌다. 그것은 단지 편곡적인 차원이나 장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의 귀가 그런 날것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전달해서는 불편하게 들리고 거칠어 보이는 세상이다. 그래서 가공되지 않은 것처럼 많은 가공을 더하는 것이 요즘의 트렌드아닌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진짜 날 것의 무엇을 만나면 처음엔 당황스럽다. 뭔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곧 우리의 귀와 가슴이, 잊고 있던 그 소리들의 감상법을 다시 찾아내 준다.
거짓말처럼. 그리고 익숙한 듯 날 것을 다시 편하게 듣게 된다.
정형근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 아리랑 라디오 프로듀서 고민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