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ts] 키라라 정규 1집
2014년 12월 22일 발매 / 2020년 10월 29일 리마스터 재발매
“눈꽃들은 모두 모양새가 다르다. 얼음 결정의 놀라운 가변성과 변이성은 현대 과학에서도 아직 정확히 분석해내지 못해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리고 “모두는 저마다의 리듬이 있고 모든 경계에는 색색의 서리꽃이 핀다.” 나는 우선 『rcts』의 첫 음반 소개문에서 희락 님이 쓰셨던 문장을 먼저 생각한다. 나는 눈을 좋아하며 아직도 내가 눈을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눈송이까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입장에서 언제나 눈에 대해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 눈송이들이 조그맣게 뭉쳐 있을 때 만들어지는 도형 때문이었다. 그 도형들 또한 마찬가지로, 미스터리한 가변성과 변이성을 띠며 저마다의 형태를 이루고, 가끔 육각형 꽃의 꼴을 띠기도 하며, 어쩌면 그것은 눈송이의 기본형이기도 하다.
2014년 12월 4일, 키라라의 첫 번째 정규 음반 『rcts』가 나왔다. 그로부터 여섯 해가 지난 2020년, 『rcts』가 새로운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쳐 재발매 되었다. 만약에 현재까지 나온 키라라의 세 정규 음반들을 이쁘고 강하며 슬픈 음악을 만들기 위한 경로라고 보며 『rcts』를 그중 ‘이쁨’의 쪽이라고 두었을 때, 이것은 물론 단순히 『rcts』가 이쁘기만 한 음반이라는 뜻은 아니다. 새로운 믹싱과 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키라라는 2014년에는 미처 마련하지 못했던 음반의 강함을 키워나갔고, 『rcts』는 그에 맞춰 더 분명히 슬퍼질 수 있었다. 조금 거칠게 퍼져있던 소리는 강하고 단단하게 뭉쳤고, 그렇게 집중된 소리의 힘은 『rcts』를 강화하며, 2014년은 2020년을 통과해 다시 변화한다. 『moves』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기 이전에 나오기도 했고, 그 당시에 실물 음반이 더 적게 제작된 것도 있었지만, 『rcts』는 키라라가 본격적으로 하나의 앨범 형식을 만들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앨범’으로써 흥미로운 순간들이 가장 다양하게 담겨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rcts』는 분명 지난 시간보다 조금 더 많은 주목을 받을 필요가 있다.
무언가를 집어 들고 숨을 훅 불거나 흡 들이쉬는 소리와 함께 키라라의 목소리가 화음으로 깔리는 “ct12021”은 『rcts』은 물론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자주 듣게 될 소리, 명징한 피아노 건반 음과 끝없이 리듬감을 불러일으키는 킥 드럼, 잔뜩 찌그러진 짜릿한 전기 기타 소리 같은 전자음, 짧은 구간 속에서 반복되거나 오르락내리락하는 음계 등을 하나씩 포개고 빼가면서 소개해 준다. 키라라의 목소리만을 다시 남기며 곡이 끝난 후, 곧바로 중역대가 빵빵하게 쌓아 올려진 “꽝”의 소리가 나타난다. 멜로디가 한 번에 기억될 고음의 리프를 받쳐주는 광활하게 배치된 소리가 정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후반부에서 갑작스럽게 조금씩 박자를 밀고 당기며 변주되는 것은 2010년대 초중반을 장식하던 ‘브로스텝(brostep)'의 드롭 부분을 키라라의 재치를 담아 만든 것으로, 데드 마우스(deadmau5)를 비롯한 여러 음악인이 들려주던 짜릿한 드롭은 이 곡에서만이 아니라 네모난 플레잉 카드를 가지고 손 놀이를 하는 모습에서 따와, 스테레오를 따라 좌우를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포크 기타 소리가 담긴 “Squared Swing”에서는 조금 더 여유와 그루브를 가진 채 떨어진다. 명확하게 집중된 소리가 그렇게 규칙적으로, 종종 엇박자로 돌고 도는 움직임은 구인회가 작업하기도 했던 오디오비주얼의 빙글빙글 번쩍번쩍 돌아가는 온갖 사각형들과도 의외로 많이 닮아있다.
그런지라, 바로 다음 곡이 단단한 정사각형과 가장 닮아있는 키라라의 첫 빅 비트(big beat) 트랙인 “ct14074”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와트엠(WATMM)에 참여했던 다른 전자 음악가들과 함께 합정의 카페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 만들어졌다는 이 곡은, 의식적으로 키라라만의 빅 비트를 찾아가다가 결국 ‘아하!’하는 순간을 만나는 쾌감이 함께 담겨있는 것도 같다. 우선 정박으로 쿵 치 딱 치 박히는 드럼들이 밑바탕을 깔아주면, 직설적인 전기 기타와 같은 소리가 첫 절반을 사정없이 긁으며 그 위를 오르내리며 점차 강해진다. 마침내 그 소리가 정점에 닿은 후 사라지고 어느새 새로운 신스음이 들어와 사라진 처음의 소리를 대체했을 때, 어느새 곡은 그 강한 힘을 머금은 채 조금 더 이쁜 곳에 도착해, 간주곡인 “intermezzo rainbow”를 거쳐 ‘Thinking' 연작들로 이어진다.
여기서 나는 몬도 그로소(Mondo Grosso)의 『Next Wave』 속 인터루드 트랙들의 제목들에서 따온 곡들이 어떻게 ‘intermezzo’라는 바로 그 뜻처럼 곡들을 한 덩이처럼 매끄럽게 이어주며 음반으로써 『rcts』를 어떻게 완성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는 음반 양 끝에 있는 두 곡 이후에 놓인 “intermezzo stars”와 “intermezzo snow” 사이, 어떻게 보자면 『rcts』의 중앙이랄 곳을 지나가는 중이다. 여기서 “intermezzo rainbow”는 직전 노래의 소리를 이으며 아예 페이드아웃 되지만, 그럼에도 ‘인터메쪼’라는 곡명 덕에 자연스럽게 “Thinking Of Rainbow”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첫 곡에서 잠시 만났던 피아노 건반 소리가 다시 돌아와, 천천히 그 강세를 조절하며 진행된다. 키라라의 감성 또는 감정을 표현하기에 편한 도구로써, 이런 건반 소리는 때로는 단호하게 끊어지고 또 때로는 울림이 남은 채 계속해서 곡 전체에 긴장감을 준다.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그 후방을 지키던 전자음과 함께 “Thinking Of Anxiety”로 넘어가는데, 이 곡에서의 건반은 훨씬 더 둔탁하게 마구 내려치는 것 같은 소리로, 앞에서의 강세 조절을 더 심화시킨다. 여기까지 끌어 올려진 긴장은 “Thinking Of Nothing”에서 샘플링된 어쿠스틱 기타가 먼저 새로이 들어온 후에, 피아노 건반과 함께 듀엣을 하듯이 서로의 소리를 주고받으며 다시 조금 익숙한 구성 속에서 풀려진다.
사실 연작을 만들기 위해서였지, 키라라가 이 곡들에 ‘Thinking'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 연관성을 그렇게까지 두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생각’들로 이뤄진 이 세 곡이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 피아노 건반으로 불안한 감정을 만들며 출발해,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마지막 부분에서 직전에 출발했던 빅 비트와 닮은 강하고 이쁜 소리로 돌아오는 것은, 『rcts』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피아노 소리가 그렇게 무지개와, 불안과, ‘아무것도’를 생각하는 과정을 통과하며 음악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그것이 어쿠스틱 기타라는 또 다른 소리와 함께 이뤄졌기 때문이라 느껴졌다. 이것은 어쩌면 ‘Thinking' 연작 뒤로 2014년의 키라라가 친구들과 함께 떠들면서 노는 소리를 넣은 “intermezzo snow”가 시작되기 때문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45초간의 짧은 떠들썩함 속에서 나는 ‘오, 관객 호응까지’와 ‘잘한다’, 그리고 ‘다 같이, 다 같이’ 같은 말을 들었으며, 천천히 솟아오르는 “Snow”의 리프가 “스노우!”를 외치는 키라라의 목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moves』에서 만나게 될 겨울 삼부작 트랙들보다도 훨씬 더 직설적이고 시원하게 소리를 쥐락펴락하는 “Snow”는 ‘이야!’ 하는 키라라의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폭발하듯 휘몰아친다. 이 곡에서 나는 다시 한번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등장한다는 걸 짚고 싶은데, “Snow”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이 건반 소리는 잠깐, 그 어떤 소리도 없이, 독주의 순간을 가진다. 많은 경우의 키라라의 음악이 만들어내는 이쁘고 강하며 슬픈, 짜릿한 순간들이 쿵쿵 울리고 짝짝 박히는 저음역대의 드럼과 그 위를 수놓는 온갖 톤의 전자음, 샘플링된 목소리, 기타와 건반의 음들이 만드는 멜로디와 리프라는 걸 염두에 둘 때,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에 잠깐 찾아오는 이 고요한 순간은 그때까지의 모든 생각들을 뒤로하고 건반 소리가 자신만의 순간을 맞는 때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시금 키라라의 ‘이야!’ 하는 고함을 소환해내며, 『rcts』에서의 힘을 가장 강하게 끌어올리는 에너지가 된다.
2014년, 『rcts』의 음반 커버를 찍기 위해 키라라와 친구들이 다 함께 출동했다. 밀가루와 꽃가루와 눈가루를 들고, 한밤중에 한강 공원으로 간 모두는 뛰고 환호하며 사진을 찍었다. 눈 올 때 밖에 있는 것을 즐기는 키라라는 이전에도 눈이 올 때면 새벽에 홀로 한강 공원에 가서 눈과 함께 뛰고 굴렀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물론 눈이 있었겠지만, 친구들도 함께 있었다. 사방에 날린 모든 가루는 눈송이의 모습을 닮아 있었고, 그 모양새는 모두가 미스터리를 가진 채 각기 다른 꼴이 되었다. 리듬과 경계마다 색색의 서리꽃들이 피었다. 언제나 『rcts』의 마지막에서 그렇게나 세차게 눈이 쏟아지는 게 지나가고 나서야 “꽃피면 같이 걸어줘요”하고 부탁하는 부분이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꽃 피면’은 미래에 대한 가정, 앞으로가 계속해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며, 또한 겨울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사실 또한 겨울 자체를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준다.
“꽃피면 함께 걸어줘요”에 대해 키라라는 2000년대의 일본 리듬 게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그때의 감성이 담겼던 제목이 지금은 부끄럽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들을 때마다 RPG 게임들에서 볼 수 있을 따스한 마지막 장면의 느낌이 종종 떠올랐다. 빅 비트의 힘 있는 리듬 구간과 반짝이며 반복되는 전자음 리프들은 물론, 음반 내내 만날 수 있었던 이쁜 톤과 멜로디, 화음이 한 번에 담겨 커튼콜 혹은 에필로그처럼 “꽃피면 함께 걸어줘요”에서 마지막 인사를 한다. 강한 눈보라가 불어닥치더라도, 그 많은 소리와 함께 그것을 즐긴다면 어느 순간 시간은 흘러가고, 꽃이 핀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시간을 버티고 기다리며 움직여나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며, 『rcts』에서 그 힘을 선명하게 들을 수가 있다.
글 : 나원영 (웹진 weiv 필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