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s] 키라라 정규 2집
2016년 2월 16일 발매 / 2020년 10월 29일 리마스터 재발매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음반’ 부문 수상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노래’ 부문 노미네이트 (BLIZZARD)
weiv 선정 ’weiv가 꼽은 올해의 앨범 (국내)’ 5위
beehype ‘Best of 2016’ 선정
“이 앨범의 모든 노래는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리지 않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두렵지만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내달린다. 지금은 겨울 한가운데에 있지만, 겨울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봄이 올 테니까.”라고 『moves』의 첫 음반 소개문에 쓰인 성효선 님의 문장을 떠올려본다. 나는 종종 시간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데, 시간이야말로 그렇게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향해 내달려가는 운동이기도 하다. 언제나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앞으로 계속해서만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다시’ 나타나고, 물론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은 정말로 지나간 것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앞선 시간에서 조금 비슷한 듯 달라진 형태를 띠고 익숙한 동시에 새롭게 나타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moves』는 키라라의 두 번째 정규 음반으로, 2016년 2월 16일에 나왔다. 『rcts』 이후, 홍대 한가운데에서 자취와 작업, 알바와 공연을 하면서 ‘강한’ 댄스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키라라가 모은 곡들이며, 다른 음반들과 함께 2020년에 새로 진행된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쳐 모든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고 강하게 집중되었다. ‘move’라는 단어를 동사처럼 받아들이면 음반명은 ‘(누군가가) 움직이다 / 움직이는’이 되겠지만,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공격 기술들로 수록곡의 이름들을 지었다는 걸 생각하면 다르게 보인다. 명사로 쓰였을 때, ‘move'에는 움직임이나 행동이라는 뜻도 있고, 특히 경기나 게임을 할 때 두는 수 혹은 ‘기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moves』는 키라라의 수, 키라라의 공격 기술, 키라라의 필살기다. 애매모호하게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역사를 꿰고 있는 내게 키라라는 자신이 3세대를 중심으로 한 [루비·사파이어]의 여러 공격 명들에서 이를 따왔다고 알려줬다. 게임에서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moves’라고 쓰인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키라라는 이쁘고 강합니다. 여러분은 춤을 춥니다.” 그 다음 네 번의 신호음이 시작을 알리며, 공격들이 시작된다.
첫 번째 공격은 “REVENGE”다. 80KIDZ의 “Venge”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다시’ 해석한 듯 만들어진 곡은 무겁게 쿵쿵 박히는 베이스음과 두껍게 부풀어진 전자음이 닮았지만, 이 음들은 갈수록 전기 기타 소리에 가깝게 몸집을 단단하게 키워간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정박으로 쿵쿵쿵쿵 저음역대를 채우는 킥 드럼과 그에 못지않게 리프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전자음이 충돌하며 힘을 겨루는데, 이 둘은 반복 속에서 커지고 작아지며 끊임없이 들리는 위치를 바꾼다. 음반의 첫 ‘겨울 삼부작’이자 키라라의 대표곡이기도 한 “BLIZZARD”가 뒤이어 나온다. 드럼의 비트와 피아노 건반의 멜로디가 따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합쳐져 탄생했다는 곡은 그런 만큼 두 영역의 소리 모두가 주어진 시공간에서 변화하며 다른 소리와 탐색전을 벌인다. 내가 특히 강하게 느꼈던 것은 키라라의 주된 장기라고 생각하는 ‘끊어치는 소리’를 건반에 적용해, 마치 멜로디가 담긴 드럼을 강하게 치는 것처럼 이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 덕에 “BLIZZARD”는 지속적해서 전경의 건반 소리를 후경으로 보내다가, 후반부에는 다시 현란한 솔로 연주를 부여하며 전경으로 다시 내보내는 식으로 키라라만의 빅 비트에서 즐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재미를 선보인다.
이렇게 공격기를 쌓아올린 키라라의 다양한 빅 비트와 하우스 트랙을 듣는 재미와 더불어, 『moves』에서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적극적으로 사용된 다양한 목소리의 샘플링이다. 정식 리믹스 음반인 『KM』이 발매되기 전이었지만, 언 해피 서킷부터 야마가타 트윅스터까지 다양한 음악인들의 트랙들로 그 작업을 해왔던 만큼 녹음된 소리를 끌어와 키라라만의 방식으로 새로이 구성하는 기술은 “FEATHERDANCE”와 이후 나올 “SLEEP TALK”에서, 또 “FISSURE”와 “THUNDERBOLT”에서도 들을 수 있다. 아쿠펜(Akufen)과 코넬리우스(Cornelius)의 곡에서 다양한 샘플들이 여기저기서 이리저리 짧게 튀어나오는 곡을 만들려 했던 키라라는 주변 음악가들에게 부탁해 진샤의 기타와 흐른의 목소리를, 또 있다(itta)의 공연을 본 후에 협업을 제안해 그의 목소리도 얻을 수 있었다. 현란한 샘플링 사용 솜씨를 들려주는 이 곡들은 샘플링된 여러 소리가 서로 격렬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꾸며졌다.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샘플링 자체부터가 거칠고 잘게 잘려나가 있거나, 진샤가 어쿠스틱 기타를 스트로크로 내려치는 구간과 줄을 살짝 튕기는 구간 등을 대비시키고, 다양한 음과 형을 띤 흐른의 목소리를 마치 악기처럼 곳곳에 붙인 다음, 이 소리가 스테레오 속에서 양쪽을 열심히 오가게 배열하는 것이 그렇다.
그런 소리가 거의 글리치에 가깝게 끊어져 튕겨 나오기까지 하는 “FEATHERDANCE”의 후반부에서 이어지는 “FISSURE”는 이어지는 흐른의 목소리에 새로운 목소리 샘플을 추가하고, 멜로디나 리프를 최대한 배재한 채 다양한 드럼 비트만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제목에 ‘틈새’라는 뜻이 있기도 한 곡은, 언뜻 키라라 식의 브레이크비트처럼 들리기도 하며 또 그렇기에 박자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써 목소리와 드럼 사이의 위계를 통일해 리듬의 틈새마다 여러 다른 소리를 집어넣는다. 이는 뒤이은 “THUNDERBOLT”에서의 샘플링 활용과 대비되기도 하는데, ‘번개’보다는 레이저 총을 쏘는 것처럼 뿜어져 나오는 전자음 리프와 함께 흐른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스네어 드럼처럼 기능하며, 천천히 쌓이는 긴장은 새로이 추가된 전자음과 천둥소리 함께 세련된 후반부로 돌입하다가, 피카츄의 한 마디 ‘피카’가 다시 익숙한 첫 부분을 불러오며 끝이 난다.
앞에서 사운드의 끝부분을 갑작스럽게 끊어지듯 처리하는 것이 키라라만의 매력적인 기술이자 특징이라고 얘기했는데, “SWORDS DANCE”의 경우 이 ‘끊어 치기’는 시간적인 진행 자체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조금 느린 속도로 시작되는 곡은 새로운 전자음이 등장하는 중반부에 전혀 다른 부분이 갑작스레 시작되는 것처럼도 들리지만, 기존의 쿵치 딱치 하는 드럼 비트가 들어오며 연속성을 다시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곧바로 새로운 피아노 소리가 트랙의 속도를 조금씩 끌어올려 감에 따라 달라지고, 지금까지 등장했던 소리가 한꺼번에 합쳐지는 후반부로 이어진다. 이렇게 곡은 그 시간적 진행에서 짐작할 수 있는 예상을 갖고 놀며, 곡이 끝나간다 싶단 느낌이 들 때 다시 갑작스럽게 붙여진 것처럼 첫 부분의 멜로디를 반복해 익숙함과 새로움을 교차하며 그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것과 비교를 해보았을 때 밑에서 끊임없이 드르륵거리며 끓는 소리와 파도처럼 솟아올랐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있다의 목소리를 천천히 고조시키는 “SLEEP TALK”는 갑작스러운 단절 없이 트랙 전체의 시간적 진행을 차근차근 총동원해 그 분위기와 긴장을 끌어올린다. 이것은 물론, 『moves』의 빛나는 마지막 부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moves』의 음반 커버에서 키라라는 새하얀 바탕에 누워 닌텐도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왜인지 음반의 주된 컨셉이기도 한 [포켓몬스터] 시리즈와 눈 모두를 연상시킨다.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쌓인 눈 위에서,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서 강력한 공격을 하는 키라라. 이는 눈 삼부작의 남은 두 곡인 “AVALANCHE”와 “HAIL”이 들려주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moves』에서 드러나는 ‘강함’은 키라라가 주어진 다양한 소리를 어떻게 자신의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에서 드러났다. 악기처럼 사용되는 샘플링들, 고음역대와 저음역대의 거칠고 짜릿한 충돌, 정박으로 박혀 누구든 마법처럼 리듬을 타게 하는 드럼, 전기 기타 소리에 가깝게 강한 힘 왜곡된 전자음, 단호하게 끊어지는 음의 끄트머리, 종종 시간을 잘라 붙여 반복하듯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 그리고 이러한 힘의 동력이자 근원은 분명하게도, 모순이다. ‘이쁘고 강한’ 모순이자 ‘슬프고 즐거운’ 이 모순은 『moves』가 어떻게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반복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를 한꺼번에 부딪치게 하고, 불연속적인 전개와 단절된 소리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진행을 만드는지 등의 다양한 공격 기술로 드러난다. 키라라의 세계는 그런 모순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슬프고 차가울 수도 있지만, 당연히 그와 동시에 기쁘고 즐거울 수도 있으며, 사실 그 모두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세차게 쏟아져 내리지만 조용하게 자박자박 내려앉는 눈보라와도, 또 고운 눈송이 입자들로 이뤄진 눈사태와 바로 그 입자들이 하나로 꽝꽝 뭉쳐 딱딱해진 우박과도 닮았다.
나는 “AVALANCHE”와 “HAIL”의 차이가 어쩌면 그러한 눈사태와 우박 사이의 차이 같다고도 느껴졌다. 그러니까, “AVALANCHE”는 짧은 구간의 조가 이리저리 바뀌는 하나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소리가 쏟아져 내려오는 분위기를 만든다. 곡이 진행되는 내내 반복되는 이 멜로디는 피아노 건반, 전기 기타같이 변형된 소리, 뿅뿅 반짝이는 전자음을 거치며 그 세기를 계속해서 전환한다. 이때 드럼같이 사용되는 후반부의 피아노 소리는 잠시 “BLIZZARD”를 떠올리게도 하며, 다시 그러한 눈의 세계로 돌아오는 쾌감을 준다. 음반을 마무리하는 “HAIL”은, 피아노 건반 소리에 조금 더 많은 자리를 내주며, 여태까지 나온 소리가 하나에 집중되게, 단단하게 뭉쳐 놓아 제시한다. 키라라의 숨겨진 공격 기술이 여기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바로 박자다. 이전에도 “ct47” 같은 곡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moves』이자 어쩌면 ‘댄스 음악’의 근본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을, 4/4로 진행되는 구성을 “HAIL”에서 의도적으로 뒤튼 것이다. 곡은 우선 7박자로 시작해 이어지다가, 피아노 소리만이 연주할 때 6박자로 바뀐다. 건반의 독주 위로 반짝이는 전자음 하나가 깔리며 음들의 듀엣이 시작될 때, 지금까지의 차가움이 동시에 따스함이 되어가는데, ‘일 이 삼 사 오 육 칠’을 세는 키라라를 따라 곡은 다시 7박자로 돌아오고 새로운 소리가 더해진다. 남아있는 다른 모든 소리가 다시 한번 조금은 익숙해진 7박자-6박자의 전개를 한 번 더 반복하며 곡을 마무리로 이끌어가고, 여기서 그렇게 큰 상관은 없지만 7과 6을 곱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42가 나온다는 걸 더하고 싶다. 여하튼, 7박자로 쿵쿵 박히는 킥 드럼과 스네어가 끝까지 “HAIL”을 배웅해주며, 그렇게 『moves』가 끝난다.
모순이 키라라의 음악을 움직이는 동력원이라는 생각은 “HAIL”이 그때까지 진행된 『moves』의 기본을 뒤틀며, 가장 완벽한 ‘댄스 음악’으로써 사람들을 춤을 추게 하지만 춤추기 힘들게도 하는 방식으로 뒷받침될지도 모르겠다. 재밌는 게 있다면 오롯이 집중해서 그 박자들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정확히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HAIL”을 들으면서 충분히 박자를 타며 춤을 출 수 있다는 점이다. 앞을 향해 무작정 내달리면서 동시에 뒤를 흘깃흘깃 돌아보기, 따뜻함과 차가움, 혹은 추움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늦겨울과 초봄의 날씨를 통과하기. 우박은 더운 날씨를 통과 중인 초여름과 늦여름에 주로 내린다고 한다. 이는 구름 안쪽에서 비가 될지 눈이 될지 아직 모르는 채 떨어질 준비를 하던 얼음덩이들이 갑작스러운 상승 기류와 하강 기류, 말하자면 오르내리는 큰 힘을 만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때문에 우박은 세찬 기류 속에서 천천히 몸을 더 크고 단단하게 불려가다가 그대로 지면으로 떨어진다. 그렇게 우박을 만들고 떨어져 내리게 하는 수많은 힘, 얼음의 굳센 응집력과 온갖 다양한 기류는 물론 가끔씩 번쩍이는 번개까지 동원되는 움직임들은, 내게 『moves』에서 들을 수 있는 그 수많은 강한 동시에 아름다운 공격 기술과 닮아있다고 분명하게 느껴졌다.
글 : 나원영 (웹진 weiv 필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