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감각, 21세기 음유시인이 전하는 초현실
조현 [감각]
고대와 중세 유럽을 관통해 활동한 음유시인은 각종 영웅담을 전하는 이야기꾼이자 시와 노래에 능한 예술가였다. 그 이름은 오늘날 문학적인 가사와 질박한 음악을 아우르는 포크와 발라드 뮤지션이나 한 곡 안에 빼곡한 이야기를 담는 래퍼를 지칭하는 말로 이어져 음유시인의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전달하는가다. 일상 밖 영웅들의 이야기로 꿈과 낭만을 전한 과거의 그들과 달리 일상에 바투 맞닿은 현실의 감정과 욕망을 읊는 것은 왠지 ‘음유시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애쉬와 함께하는 듀오 Animal Divers 활동으로 세상에 자기 이름과 존재를 알린 조현. 그는 내가 상상하는 음유시인의 모습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이다. 머나먼 이국 여행지에서 만난 악기들과 사랑에 빠져, 많은 이들에게 이름부터 생경한 디저리두 (Didgeridoo)와 핸드팬 (Handpan)에 몰두하기 시작해 몇 년 사이 국내에 손꼽는 전문가이자 프로 연주자가 되었다. 변변한 레퍼런스는 물론 제대로 된 창작곡이나 무대도 없는 상황 속에서 오롯이 악기와 음악을 향한 애정과 열정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그의 첫 솔로 앨범이자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핸드팬 창작 앨범 [감각] (Sensation)과 그 배경의 스토리는 말하자면 일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없는 낭만적인 모험담이다.
[감각]이 전하는 이야기가 가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특별히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단지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다. 영롱한 선율이 있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리듬악기인 핸드팬 사운드를 중심으로 악곡을 채운 미니멀리즘 연주 음악이 일상의 언어로 녹아들기엔 아직 적잖은 장벽이 있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음계의 한계 탓에 대부분의 핸드팬 음악이 고민 없는 즉흥으로 연주되거나 기존 곡을 답습하고, 명상이나 요가 같은 활동의 배경음악 그 이상을 넘어보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현은 악기와 현실의 벽에 직접 머리와 몸으로 부딪치면서도, 일상과 낭만, 현실과 모험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기 위해 더욱 다양한 시도를 고안했다. 사명감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여러 자작곡 가운데 추리고 추려 그만의 서사를 완성했고, 각 수록곡은 다양한 음계와 화성을 활용하면서도 전위적인 구성은 지양했다. 원하는 장면과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싱잉볼 사운드, 첼로와 바이올린 등의 가상악기 사운드, 가야금과 해금 같은 국악기와의 협업도 곁들였다. Animal Divers의 동료이자 인디음악 신에서 여전히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는 베테랑 애쉬는 선배이자 조력자로서 편곡과 프로듀싱에 힘을 보탰다.
오롯이 핸드팬 사운드로만 이루어져 차분히 그 소리와 아이스 브레이킹하고 관계를 맺게 되는 첫 번째 트랙 ‘리트릿 Retreat’부터 부여의 옛 지명인 가림성에서 해가 가려지는 모습을 서서히 박진감 있게 연출한 ‘가림 Garim’, 양재천에 뛰노는 물고기의 역동적인 모습을 리듬감 넘치는 타악 효과로 풀어낸 ‘물고기 Fish’까지. 앨범의 전반부는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의 모습을 관조하며 연작으로 이어진다. ‘카르마 Karma’부터는 전환점을 돌아 조금 더 깊숙이 내재한 우리의 의식을 들춘다. 주제 제시, 변주와 확장, 다시 간결한 마무리로 순환하는 이 곡의 왠지 처연하면서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 서사는 제목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고스란히 상징해주는 듯하다. 꽃이 피는 모습을 민요 스케일 및 산조 가야금을 활용해 표현한 ‘개화 Blossom’가 음을 타고 두드리는 두 악기의 공통적인 인상을 파고든다면, 호수에 비치는 이미지와 수면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나타낸 ‘물거울 Water Reflections’은 핸드팬과 달리 음을 길게 끌고 가는 찰현악기로서의 해금의 특징을 살려 물의 이면 속성을 절묘하게 드러낸다. 제주 지명을 따와 그곳의 바닷가 소리를 고스란히 담은 ‘위미 Wimi’의 경쾌한 마무리는 한바탕 이야기보따리를 펼친 후 다시 새로운 모험을 떠날 생각에 들뜬 여행자의 마음과 닮아 있다.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아르튀르 랭보, [감각] 중에서) 조현은 이 앨범의 타이틀을 19세기 프랑스 현대시인 랭보(Arthur Rimbaud)의 시에서 따왔다고 말했다. 37세에 세상을 떠난 랭보가 고작 16세에 쓴 이 시에는 일찌감치 자신을 자연 속 행복한 ‘몽상가’, ‘방랑자’로 비유한 그의 범상치 않음과 초월적인 면모가 두루 묻어나 있다. 자연스레 랭보의 시구에 감화한 조현의 의식이, 핸드팬에 흠뻑 빠진 그의 마음이 하나로 꿰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때때로 지나치게 정치를 이야기하고, 산업을 말한다. 일상을 끌어들이고, 비즈니스를 엮는다. 당연하고 마땅한 얘기다. 이 음악에 관해서도 마치 국악이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 변방 비주류 악기의 연주음악이, ‘세계음악’이라는 서구음악 관점의 편향적인 개념을 뚫고 청취음악의 틈을 어떻게 파고드는지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술은 여전히 현실과 일상으로부터 유리된 세계에 내 몸과 의식이 편입하는 방식, 몸과 의식에 세계의 아름다움을 기입하는 ‘감각’의 영역이기도 함을 이 앨범을 통해 되새긴다. 2021년의 음유시인이 전하는 판타지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 / 대중음악평론가 정병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