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마! 어차피 우린 다 안될 거야"
김페리의 원룸 사운드 EP 앨범 [세상에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어]
청춘을 소개할 땐 어떤 식으로 소개를 할까? 열정? 패기? 희망찬 내일? 하지만 어쩐지 그 말들은 다 옛날이야기인 것 같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 끝도 없이 공부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삶은 나와 거리가 너무 멀다. 주변의 누구는 어느 일류 대학을 갔다느니... 누구는 어느 기업에 좋은 조건으로 취업했다느니... 누구는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투자로 돈 좀 벌었다느니... 잘 된 이야기들은 자꾸 들리는데 난 아니다. 늘어가는 건 대출금밖에 없는 것 같다. 새로운 걸 시작하기엔 이번 달을 버티기도 팍팍하다. 용기 있게 새로운 걸 시작해도 마찬가지다. 희망찬 내일을 꿈꾸자니 하루가 너무 팍팍하다. 세상은 나에게 노력하라 말한다. 하지만 난 딱히 노력을 안 한 적도 쉰 적도 없다. 팍팍한 청춘에게 열정은 과욕이다. 힐링? 그래봐야 하루짜리다. 이 앨범은 그 이야기에 가감 없고 솔직하게 말한다. "힘 빼고 살어 어차피 우린 다 안 될 거야"
이 앨범은 조악하다. 앨범을 소개하는 글에 이 무슨 말인가 싶어 무어라 예쁜 말로 꾸며낼 다른 말이 있다면 좋겠지만, ‘조악하다’라는 말만큼 어울리는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어쩐지 어설픈 노래와 종종 째지는 듯한 기타 연주들이 그 점을 보여준다. 믹스와 마스터링에서 그 점을 보완해 준다는 건 나름의 희소식일까?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홈레코딩도 스튜디오 못지않은 고품질의 사운드를 보여주는 시대가 온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어쩐지 뮤지션 본인은 그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뮤지션 본인의 전작들을 미루어 봤을 때 조금은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 점이 뮤지션이 이 앨범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는지 그 태도를 더 잘 드러내는 듯하다. 어쩌면 삶이란 미완성일 때 아름답기 때문 아닐까?
앨범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희망은 없음을 노래한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냉소적이고 자조 섞인 톤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큰 이유는 없다. ‘인트로’ 트랙의 가삿말 "해가 뜨고 해가 저문다 어제처럼" "꿈이 사라져간다 어제처럼" 부분이 말해주듯 우리는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트랙 ‘안녕’은 이별에 대해 노래한다. 인상적인 기타 리프로 시작하여 ‘The whitest boy alive’를 연상하는 듯 조촐한 밴드 사운드로 댄서블한 편곡을 보여준다. 그러나 설명만큼 유쾌하거나 신나진 않다. 가삿말처럼 우린 무언가와 이별할 것이고 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느낌인지 궁금하다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한번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싱글로 선공개되었던 트랙 'GAME'은 아기자기한 악기 구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알아 아무리 불러본대도 알아 아무 의미 없다는 걸"과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꾸준하게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이 곡에서도 돋보이는 기타 리프는 이제는 이 뮤지션의 전매특허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끔 한다. 음악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인생 조언(?)을 담은 skit 트랙을 지나면 '끊었네'라는 곡이 대뜸 우리를 향해 노래한다. 화자가 태어나기도 전 시절의 올드하고 빈티지한 과거의 록 사운드를 오마주한 이 곡은 밝은 느낌의 곡 분위기와 가삿말이 어우러져 굉장히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서 이 곡은 앨범의 주제를 관통하는 트랙이 되어 버린다. 싱글로도 발매된 이력이 있는 '우리가 서럽게 울던 밤은 어제와 다르지 않겠지만'이 흐른다. 레코딩은 새롭게 진행되었으며 그로 인해 한층 더 진보한 사운드를 보여준다. 그래도 우리 곁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다른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이 곡은 어쩌면 헛되고 어설픈 위로의 말보다 나의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더 나은 게 들어주는 것 아닐까 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팍팍한 우리 삶의 자그마한 희망이라면 이런 걸까? 이후로는 마치 'The Velvet Underground' 시절 음악의 나른한 분위기를 뽐내는 트랙 '이대로'와 '안녕 리믹스'까지 듣고 나면 당신과 이 앨범의 하루는 지나게 된다.
어떤 음악들이 유행할까? 확실한 것 하나는 그중에 이 앨범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모두가 잘나가는 것 같고 나만 제자리에 머문듯한 우리네 하루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음압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강력한 음악이나 파워풀한 보컬의 음악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꽉꽉 들어차지 않으면서 조금은 빈틈을 허락하는 사운드,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듯한 보컬과 로맨틱은 개나 줘버린 듯한 다소 냉소적인 가삿말은 이 앨범을 구성하는 주요소이다. 비슷한 뮤지션을 찾기도 힘들다. 이렇게 하면 망할 거라는 걸 다들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힙한 것을 찾지만 전혀 힙하지 않다. 그래도 화자는 계속해서 그렇게 노래한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침울한 이 앨범은 화려하고 멋진 음악들 저 구석탱이 변두리에서 또 다른 빛을 발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