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니 EP [2]
“절벽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짜릿함, 유쾌한 변칙주의자의 사이키델릭”
향니라는 그룹을 처음 본 건 오래 전 ‘헬로루키’ 심사장에서였다. 무대를 주시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과장이 아니다.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듯한 저 퍼포먼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태롭게 나부끼는 음악이 먼저 귀에 들어왔다. 뒤죽박죽 질서 없이 뒤엉킨 노이즈의 만찬. 어디에서도 레퍼런스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시이나 링고, 팝, 재즈를 제 마음대로 가공해 믹서기에 넣고 돌렸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억지로 조합한 비유일 뿐. 그들의 음악엔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아우라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다음을 기대하게 되었다.
글쎄. 제대로 된 결과물 하나 없는 그룹의 장래에서 뭘 그리 대단한 걸 찾으려 했을까. 하지만 뭔가 잔뜩 아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게 남아 있다는 인상이었다. 정확한 근거는 댈 수 없었지만. 그러나 얼마 후, 향니의 첫 정규작 [첫사랑이 되어줘](2014)를 접하고 나는 그 뜬금없는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포스트 펑크와 코미디의 만남? 동화적 상상력이 결합된 케이팝? 하지만 역시 그 어떤 범주에도 100% 들어맞지 않았다. 그게 향니 사운드의 본질이라는 걸 음반은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장르를 파괴하고, 뿌리를 교란하는 음악이 아닌가. 이렇게 유쾌할 데가. 한참 동안 음반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여기 그들의 새 EP [2]가 나왔다. 리더 이지향에 따르면 이번 음반은 “향니식 사이키델릭을 구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1960~70년대 ‘클래식 록’적인 향취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향니의 음악은 애초부터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2000년대에 등장했던 일군의 ‘네오-사이키델리아’를 가져올 이유도 없다. 그가 언급한 ‘사이키델릭’이란 장르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음악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의 음악을 이끄는 원동력은 ‘혼돈’이다. 소외와 고독, 나를 떠받치고 있는 지지대의 상실, 시스템에 대한 복종. 본인이 살아가며 경험했던 파편들이 곡을 쓰게 만들었다. 대가 없는 사랑에 대한 감정을 멀미 날 것 같은 노이즈로 표현한 ‘우주소년’, 익숙한 시공간이 상실되었을 때의 현기증을 드림 팝/슈게이징의 문법으로 담아낸 ‘다이빙’, 인간의 근원적 한계로부터 오는 불안함을 앙칼진 사운드로 그린 ‘불안지옥’ 등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메인스트림 팝과 아방가르드 록의 감성이 동시에 두 귀를 찌른다. 저 양가성이야말로 향니만이 가지고 있는 보석이다.
비교적 짧은 작품이지만 낙차가 상당하다. 슬로 템포와 가사의 에로틱함이 반전을 선사하는 ‘내 방의 끝’, 보이스 변조를 통해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비극’을 유머러스하게 전달하는 ‘엄마 몰래 문신’, 가장 휘몰아치는 사운드로 듣는 쾌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복종중독’. 하나의 곡 안에서, 그리고 음반 전체를 통해 향니는 ‘변칙주의자’의 방법론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활용한다. 절벽 위에서 아래로 그야말로 브레이크 없이 추락한다. 짜릿하다.
풀렝스 음반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EP만으로도 그들의 매력을 파악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몇 번 돌려 듣고 나니 어질어질하다. 단순히 음표를 휘저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2]는 밴드 향니의 정체성을 어필하기에 충분한 곡들로 가득 차 있다. 그 모두가 느낄 수 있지만 그 모두가 말하지는 못한 것들. 바로 향니의 음악에 은닉해 있는 것들이다. 이만하면 꽤 솔직한 추천사가 아닌가.
글. 이경준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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