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몸의 감각
― 신현준(a.k.a. 신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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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취향의 적폐'가 되어 버린 혹은 되어 가고 있는 현재 40~50대의 누군가에게 이 음악을 들려주면 아래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어떤날의 영향이 보이는데 프로페셔널이 아니고 아마추어 같다”, “전람회 같은 감성이 있는데 가창력이 부족하다” 등등. 가장 좋게 들은 사람의 반응은 “이 시대의 동물원이네”라고 말할 것이다. 천용성의 1집 《김일성이 죽던 해》는 실제로 이런 반응을 들었다.
위의 반응들은 새롭게 나오는 음악에 대한 가장 나쁜 태도라는 말을 하기 위해 가상의 예를 든 것이다. 음악에 대한 글들이 너무나 많은 ‘영향’과 ‘계보’를 따지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까지 음악을 들었다고 언니네 이발관과 브로콜리 너마저를 언급하더라도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
현재가 과거의 여러 가지 사건들 위에서 구축되지만 그저 과거의 현현顯現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무의미조차 찾을 수 없다. 그건 마치 현재 그리고 미래에 새로운 것은 나타날 수 없다는 묵시록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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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용성이라는 음악인에 대해 내가 아는 정보는 거의 없다. 단지 그가 수줍고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세심히 들여다볼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그의 노래에는 사랑, 장애, 투쟁, 우정, 개발, 불치병 등이 소재로 등장하고 쫓겨난 사람들, 중학생, 군인, 식물원에 놀러간 사람, 명절에 만난 어머니 등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래들이 ‘사회적으로 의식 있는 메시지 강한 곡이다’라는 인상을 준다면 위의 설명은 처절히 실패한 거다. 천용성은 기성의 언어로 말끔하게 정의된 의식들을 가사로 옮기는 대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감각으로 만들어 낸다. 그래서 직업적 작곡가가 만든 멜로디 위에 직업적 작사가가 만든 가사를 얹는 대부분의 노래와 질감이 다르다. 천용성만 이렇게 노래를 만드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난 몇 년 나온 음악들 가운데 그가 만든 노래가 가장 자연스럽게 들린다.
가사가 단지 곡조에 붙은 말이 아니라 자체의 운율을 가진 시, 아주 오래된 말을 빌려 오면 시가詩歌라는 점은 고답적으로 들릴 수 있다. 음악이 단지 곡조를 엮어낸 게 아니라 노랫말과 분리될 수 없는 소리라고 말하는 것도 새삼스럽기는 하다. ‘포크’나 ‘싱어송라이터’ 같은 20세기의 장르 구분을 지금도 말하는 것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의 음악은 ‘메시지냐, 사운드냐’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세심하게 쌓아 올린 것이 역력한 곡들뿐만 아니라 옆집 총각이 기타만 치면서 부르는 듯이 엉성하게 만든 곡들도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는 이야기꾼, 이른바 스토리텔러인데, 그 스토리들은 단조롭게 낭독되지 않고 오묘한 굴곡을 가진 파형의 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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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도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청년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글쓴이는 관심만 있을 뿐 실제를 알지 못한다. 그들의 문제에 공감하지만 해결책을 모른다. 그 문제가 《수몰水沒》이라는 앨범 제목에 드러난다고 잠시 망상을 해 본다. '수몰'이라는 행위는 살아온 장소에 대한 기억을 소멸시키는 난폭한 일이지만 체념 말고는 그 고통스러운 감정을 다스릴 마땅한 방법이 없다.
그걸 “깊은 물 안에 있어요”라고 담담히, 그리고 동화적으로 표현한 것은 ‘신기하게도 계속, 살아 있다’는 자각으로 들린다. ‘루저’, ‘88만원 세대’, ‘잉여’, ‘N포’ 등의 어휘를 발명하여 분노를 터뜨리던 일도 10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은 오히려 낯선 것이다.
그래서 〈있다〉가 앨범의 첫 트랙이자 ‘미는 곡’인 건 나에게는 당연하다. “우린 녹색 땅 빨간 소파에 앉아”라는 원색의 색감의 장소에서 “짐승처럼 몸을 부대끼며 놀았지“라는 도입부만으로 게임 끝이다. 그 뒤로 야한 화음과 더 야한 표현이 나온다. 인디 음악 대부분이 언젠가부터 힙스터 소년·소녀들의 ‘건전가요’가 되어 가는 현상이 의아했던 나에게는 소중한 발견이다.
그래서 나는― 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이 음악에 작가주의와 인디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작가주의와 인디라는 말이 ‘상업적으로 도저히 팔 수 없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변명이라면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가 ‘한 명의 남자’에만 주로 주어지는 호칭이라면 그것도 회피하고 싶다. ‘천용성’이란 한 명의 ‘솔로 가수’를 넘어 그를 포함하여 객원 여성 보컬과 세션 연주인을 아우른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즉, 천용성이라는 아티스트는 고독한 개인으로 살아 있기를 넘어서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 있기를 택하는 윤리이자 미학이다. 그 윤리와 미학이 ‘글로벌한 성공을 위해 극심한 경쟁을 감수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윤리와 미학의 반대편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스토리텔러들이 스멀스멀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그들은 살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오래 지속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