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BURNING)”, 가려진 자의 시선
가려진 자는 보지 못한다. 온전히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틈새 사이로 세계를 보는 자의 시선은 불완전하다.
라네스터 스코프(Lanester Scorff)의 첫 번째 정규 앨범 “버닝(BURNING)”은 세계를 응시하지 못하는 예술가의 시선을 담고 있다.
훌륭한 퀄리티와 짜임새 있는 앨범 구성,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가사를 생각하면 이 앨범은 그의 커다란 성취이자 큰 발자취이다.
1. Scene #1 (숨)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로 시작되는 이 곡은 한 연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앨범의 막을 연다.
누군가에게 안겨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노래이다. 하지만 이 곡은 단순하고 뻔한 로맨스를 담아내지 않는다.
더 높은 성취를 위한 열망과 이로 인한 불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하는, 역설적인 감정이 묻어있는 곡이다.
앨범은 이 곡을 기점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응시하지 못하는, 꿈에서나 가능한 로맨스를 붙잡으려는, 보지 못하는 자의 슬픔을 풀어낸다.
2. 홀로 서는 법
강렬한 록 비트에서 자그맣게 흘러나오는 독백은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 생각에 갇혀 세상을 마주하는 그는 홀로 있지만 홀로 서지는 못한다. 밤공기를 맡으며 떠도는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려 하지만 그 무언가를 찾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이 어둠으로부터 구원을 청하면서도 동시에 혼자서 버티며 세상을 마주하려는 불안한 자의 외침이 곡을 관통한다.
영화 [버닝]을 모티브로 한 노래인 만큼, 영화 속 주인공이 예술을 하려는 의지와 동시에 부모 세대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려는 감정을 음악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경제적, 정신적 독립과 함께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려는 자의 불안정한 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곡이다.
3. TOY STORY
분위기를 환기하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는 사랑 노래다. 한낱 장난감으로 치부되는 남자의 혼란스러운 심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철저히 자신의 시선에서 사랑을 서술하지만, 그 시선 역시 확신에 가득 찬 것이 아니기에 지금의 사랑에 대한 분노와 불안이 느껴지는 곡이다.
누군가에게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지다 버려지는 자신을 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책하고 이러한 상황을 비관하는 1절과 그와 동시에 상대를 욕하고 깎아내리려는 2절의 피쳐링이 조화를 잘 이룬다.
4. WRONG
WRONG. 이 노래에는 무언가가 잘못됨을 깨달은 남자의 후회와 비참함이 잘 드러난다.
사랑을 위해 살았고,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남자가 사랑이 거짓됨을 알게 되었다.
그는 더는 삶을 연명하고 일상생활을 아름답게 꾸밀 자신이 없다.
이별마저 사치가 되어버린 그는 사랑에 대한 생각과 관계에 대한 대화마저 거부한 채 “만나준다”는 표현에 걸맞은 껍데기 같은 관계를 이어간다. 잘못된 것을 알았지만 그 잘못된 것을 어떻게 고칠지, 바꿔나갈지를 몰라 방황하는 남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사랑은 애초에 거짓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 변해서 우리는 관계에 질리는 것일까? 그는 전자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한다. 자신의 외로움과 콤플렉스, 극복하기 힘든 자신의 아픔을 연인을 통해 해소됨을 간접적으로나 느낀 그는 거짓된 사랑을 한 것이고 자기 역시 이에 빠져 스스로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 모든 불편한 진실과 자신의 깊은 내면의 추악함을 깨달았을 때 더는 어떤 것을 원하지도, 어떤 것을 버리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되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며 스스로마저 방관하게 되는 그의 무력감이 나타난다.
앨범에서 이 곡 이후에 나오는 어둡고 무거운 곡들에 비해 WRONG은 조금이나마 밝고 부드러운 감정선을 유지하려고 한다. 반복되는 후렴구로 자신을 계속 성찰하는 방식은 이 트랙 이후 곡들의 깊이와 무게를 암시하는 듯하다.
5. ADDICT
이 사랑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이미 깊숙이 자신의 삶에 침투한 상대에게 중독된 남자의 이야기다.
끊임없이 유지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위태로운 관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의 이야기.
6. Scene #2 (In Peace)
이 곡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전주와 함께 이후 트랙들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스트링 사운드가 인상적인 이 곡은 트랙 "Bambi"가 지닌 주제가 더 빛나기 위해 이에 맞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앞에서의 트랙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풀어냈다면 이 트랙 이후로 노래들은 좀 더 라네스터 스코프 스스로에 대한 생각과 성장, 아픔에 집중한다.
7. Bambi
서문에 그의 시선이 가려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랑이 떠나고 혼란 속에 방황하던 그는 결국 어둠에 익숙해진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전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라고 하지만 실은 이미 떠나간 여인을 부르며 상상 속에서의 만남을 기대하는 그의 감정.
Bambi는 애니메이션 [Bambi]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이 곡은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커가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버닝] 속 성장과 연관되도록 재해석하여 라네스터 스코프의 독자적인 성장의 이야기로 창조된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8. homecoming
앞을 보지 못할 때 우리는 과거를 돌아본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은 결코 그리 슬픈 일이 아니다. 한 아티스트가 미래의 불안을 피해 과거의 행적을 되짚는 것은 도피가 아니다. 지금은 가려진 시선을 가진 그이지만, 그에게 유일한 행복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과거의 순간들이 축적해놓은 지금의 자신에 대한 회고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만들어준 모든 과거의 순간을 예찬한다.
그에게 homecoming의 뜻은 단순한 귀향 그 너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잊지 못할 항해를 함께한 선원들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며 새로운 도전을 향해 항구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보라! 그는 결코 home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그는 더 큰 세계에서 업적을 이루기 위해 일시적인 정착을 하는 것일 뿐.
이 곡은 도전과 현실을 오가며 삶을 회고하는 아티스트의 자전적인 곡이라 볼 수 있다.
9. lost
앨범은 이 노래를 기점으로 또다시 분위기가 달라진다. 어둠에 오래 갇혀있던 그는 스스로 헤매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여전히 자신을 생각하고 이 암흑을 공감하는 소중한 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다시 알리는 노래.
거짓말, 섹스, 중독에 빠져 헤매는 그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건실함을 보여주는 나약한 자의 몸부림이자 곡으로나마 표현되는 그의 파편화된 영혼의 조각들이 기타 소리와 어우러진다. 이 시대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곡으로도 보인다.
[버닝]에서의 아버지는 자녀 세대에 짐이 되면서도 그들의 빛이자 어둠이었다.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가 없어진 세상에서 고독하게 길 잃은 주인공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10. IDWD
I Don't Wanna Die의 약자.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 하지만 어두운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예술가는 결국 인간 본연의 욕구, 생존을 갈망한다.
새로운 시작을 기쁘게 맞이하라는 세상의 말과는 다르게 내면에 지닌 불안감을 조용한 톤으로 읊조리는 이 곡이 이 앨범에서 가장 어두운 곡으로 볼 수 있다. 이전 트랙에서 보여준 회상과는 다른, 후회라는 감정이 이 노래를 지배한다.
11. Scene #3(성장)
성장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곡은 Scene #2와 비교해 더 강렬한 스트링 사운드를 이용하면서 고조되는 감정선을 비트로 잘 표현해낸다.
해당 연주곡은 영화 [버닝]에서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한 곡이다. 불안과 상처로 점철된 인물이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통해 열등감과 분노를 스스로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이 곡의 핵심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강한 동기부여와 복잡한 감정이 오가는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이 다채롭고 격정적인 사운드를 사용하는 이 트랙을 통해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감정을 담은 이 트랙은 더 큰 주인공의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예고하듯 기타 사운드가 다음 트랙과 이어지는 역할을 하며 마무리된다.
12. Scene #4 (BURNING)
Scene #3 아웃트로의 기타 사운드가 이어진다. 하지만 Scene #3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불길한 느낌이 이 트랙을 전반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이 연주곡은 영화 [버닝] 속 살인이 일어나는 시점을 앞둔 주인공의 불안을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릴러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이 사운드로 색다르게 표현된 것이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3. Black
이제 앞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다. 누군가가 불을 밝혀주기를 원하는 예술가. 빛을 원했던 그는 초반 트랙에서 보이듯 연인으로부터 그 빛을 추구했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는 그는 관계에서 주어지는 아름다운 빛을 탐하지 않는다. 어두움에서 혼자 즐기고 혼자 춤을 추지만 결국에 다시 어둠뿐이라는 자각을 했을 때 그는 신을 향해 이 암흑에서 구원해달라고 외친다. 어쩌면 그가 벗어나려는 어둠과 함께 있기 싫어하는 악마도 전부 그가 스스로 창조한 것일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세계에서 눈 뜨지 못해 어두움에 잠식되어가는 그의 내면이 잘 표현된 곡이다.
14. .(점)
그토록 어두운 분위기를 유지하던 이전 노래들의 감정은 이 곡에서 절정에 달한다. 초반 트랙에서 보여준 사랑의 무의미함과 새 도전에 숨겨진 불안과 분노가 이 곡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어두움과 혼란, 방황에 점점 녹아든 그의 삶이 그의 손에서 놓인다는 감정이 노래 전반적으로 흐른다. 점점 사라지는 빛과 이미 가려져 언제부턴가 익숙해진 어둠은 그를 모든 것한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자신의 소중한 것 역시 짐으로 바꾸며, 자신을 포기하게 만든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자기도 믿지 못하며 깊은 어둠에 서서히 가라앉는 예술가의 고독과 불안을 짜임새 있는 곡 구성과 시적인 가사, 자조적인 목소리로 이 앨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15. Scene #5 (TOKYO)
감정의 끝을 찍고 서서히 죽어가는 목소리로 불리는 곡. 약간은 희망적이지만 슬픈 멜로디로 풀어내는 기타 소리 위에 조각나면서 흐릿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유서 테이프 같은 느낌을 준다.
이미 포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또다시 홀로서기 위해 점점 잠식되는 자신을 멈춰줄 누군가를 바라는 이 곡의 주제는 앨범의 완벽한 마침표를 찍는다. 무너지고 부서져 세계에서 잊히는 자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갈망하는 처절한 가사는 그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담아놓은 듯하다.
앨범 “버닝(BURNING)”은 영화 [버닝]으로부터 모티브를 받아 자전적인 라네스터 스코프(Lanester Scorff)의 삶을 담아낸 작품이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힘찬 도약을 통해 발전된 음악을 만들려 노력해왔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곡 하나하나에 담아내었다.
앨범 곳곳에 붙여진 ‘Scene’ 제목의 트랙들은 이 앨범의 모티브 영화인 [버닝]의 장면들을 청각적으로 묘사한다. 기존의 라네스터 스코프가 시도한 방법과는 다른 독창적인 이 트랙들은 앨범의 사운드를 더 다채롭게 만들고 앨범이 지닌 주제 의식을 더 부각하는 장치의 역할을 한다.
자칫 개인적인 이야기만을 담은 심심한 앨범이 될 수 있는 느낌을 극복하고자 영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 이 Scene 트랙들이 지닌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비슷한 사운드와 주제 의식을 담은 트랙들을 묶어서 짜임새 있는 구성을 완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Scene 트랙들이 매우 탁월하게 배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앨범은 예술가가 되고 싶은 청년이 지닌 불안과 이를 해소하기 위해 행하는 사랑, 방황, 죄 등등이 지닌 어두운 면을 들춰낸다. 22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더 큰 세상으로 나가려는 열망과 이에 대한 원대한 계획과 잠재능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라 생각이 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