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와 피터팬의 중간 그 어디쯤”
오래전 일인데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선명한 기억들이 있다. 그것이 오랜 시간 반복해 겪은 일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실제로 인상적인 장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온갖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던 시절의 기억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를테면 디지털 웹툰 시대를 거스르는 만화적 상상력으로 트랙을 알알이 채운 이 앨범이 그렇다. 한창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도 대부분 기억 못 할 2000년대 전후의 순정만화 [홍차왕자]를 환기하거나, 무려 15년 전에 썼던 곡을 마치 요즘 이야기처럼 뻔뻔하게 소환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다. 뻔한 단어와 수식을 답습하지도, 아련한 감성에 기대지도 않은 덕분일까? 스스로 감탄하며 멜로디와 리듬에 마음을 내어주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시티팝만 레트로냐? 기타팝도 레트로지.’
‘전복들’의 이름을 곱씹으며, 리더이자 프론트맨인 고창일을 곁에서 바라보며 무척 절묘하다고 생각한 적 있다. 과거 싱글 ‘빨갱이’(2018)에서 금방이라도 뭔가를 뒤집어엎을 것처럼 전복(轉覆)적인 제목과 가사를 읊고, 지난해 싱글 ‘We Are Here And Everywhere’처럼 현시대 상황에 대해 울부짖다가도 말랑말랑한 해산물 전복처럼 난데없이 깔끔한 원정이(‘원정이는 깔끔해’)를 찾고, 그대를 빗댄 봄나물(‘봄나물’)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이들이다. 따뜻하고 당찬 긍정성으로 당신을 위로하는 것(‘다가당’(2018))도, 비틀거리는 오늘에 몸을 맡기는 것도 전부 전복들이다. 전부 다른 것 같지만 결국 유난히 예민하고, 동시에 낭만적인 전복들의 감성과 취향은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특유의 작명 센스처럼 고고하기도 하다.
이러한 전복들이 가장 많은 수록곡을 포함해 야심 차게 내놓는 EP인 만큼 [전복코믹스]는 앞선 전복들의 정신과 감성을 집대성한다. 전복들의 물오른 멜로디 감각과 마치 소녀나 소년 같은 상상력, 달콤한 보컬 라인과 코러스가 첫 트랙 ‘홍차왕자’에서부터 빛을 발한다. 뒤를 잇는 ‘투명인간’에서는 어제를 복각한 찐한 향수와 감정이 눌러 붙는다. 청년들과 함께 호흡하는 조금 앞선 기성세대로서의 고민과 안타까움, 소수자와 약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서정은 타이틀 ‘꽃병 속 꽃은 뿌리가 없다’와 마지막 곡 ‘이 밤은 널 좋아하니’에 잘 드러나 있다.
한 사람의 일평생 지속되는 취향은 10대 때 일찌감치 결정된다고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진리다. 물론 기억과 취향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만 예민한 감각과 말랑말랑한 감성은 오늘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아니, 노력하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나보다 더 그러하다고 믿음이 가는 사람들도 있다. 체 게바라가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품은 리얼리스트’가 되라고 했다던가? 전복들을 볼 때마다, 이들의 음악과 가사를 곱씹을 때마다 돌이키기 어려운 어제의 향수를 오늘의 문제의식과 상상으로 풀어내는 낭만적 리얼리스트가 떠오른다. 체 게바라와 피터팬의 중간 그 어디쯤.
정병욱(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