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18 40년에 헌정하는 음악을 위촉받았습니다.
일개 작곡가로서 아직 충분히 치유되지 못한 무겁고 깊은 상처에 감히 다가가도 되는 것인지 많은 날들을 고민했습니다.
남도의 진수라 일컬어지는 육자백이의 한 절을 떠올렸습니다.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구나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쏘냐
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 잊어 휘휘 감고만 돌(거나 헤~)
노래하는 정은혜는 진하디 진한 계면조의 가락을
갓난아기를 잠들게 하는 아련하고 포근한 자장가로 바꾸어 들려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못 있겄네… 잊지 않는다… remember… memorare…
‘내 정은 청산이오’로 음악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글을 쓰는 박창학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선율 위에 앞서 나간 이가 남은 이에게 부치는 편지를 써주었고 그 노래로 끝을 맺었습니다.
날 붙잡지 못한 걸 후회하지 말아요
날 기억해 주는 것 그걸로 됐소
어찌 우리 그날을 잊을 수 있겠소만
어찌 우리의 한이 풀릴 수 있겠소만
얼마나 더 그대를 기다릴 건지
언제 우리 웃으며 또 만날 건지
그때까지 그대여, 부디 잘 계시오
그때까지 그대여, 부디 잘 계시오
이 작업의 여운을 안고 곧바로 장민승 작가의 시청각 프로젝트(audio visual project) ‘둥글고 둥글게(round and around)’의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마치 두 작품이 하나인 것처럼.
작품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그 전(1979년 부마 민주항쟁)과 그 후(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 이르기까지의 대한민국을 사진과 영상 그리고 문서의 아카이빙으로 담아냅니다.
이 음반(psalms)은 '둥글고 둥글게'를 위해 작곡된 음악들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작곡을 해나가면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못 있겄네…
몇 해 전 매우 추운 계절과 더운 계절에 방문했던 아우슈비츠를,
독일의 친구들에게 전해 들었던 참혹한 비극을 기억하는 법을 떠올렸습니다.
'내 정은 청산이오’는 남도의 민요와 씻김굿가락 그리고 기억과 안부의 노래를 통해 그날들이 씻겨지기를 기도하는 음악이었습니다.
psalms의 음악을 만들어나가면서 인간의 비극, 고통과 우둔함은 왜 이다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란 한낱 숨결과도 같은 것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시편 144:4)
아주 오래된 유대 경전 속에서 되풀이되는 고통에의 절규, 운명에 대한 원망, 신을 향한 하소연, 간절한 기도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장민승 작가가 신중히 고른 30장의 기도 속에서 12곡의 음악을 길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삶이 생겨난 지점부터 함께 태어나는 고통과 상실을 노래하기 위해 고대 기독교 전통의 합창곡 형식을 생각했고 아카펠라를 중심으로
절규하고 탄식하는 정은혜의 구음, 일렉트로닉 음향 그리고 현악 앙상블을 함께 구성했습니다.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 (시편 89:48)
끊임없이 돌고 도는 역사의 거대한 쳇바퀴 속에 무기력하게 얹혀진 개인의 삶,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의 외침 그러나 그 안에서 끝끝내 기억해 내고 찾아내야만 하는 진실의 순간들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음악을 만들어나갔습니다.
1년 남짓한 판데믹의 폭풍을 지나오며 그리고 상실과 아픔을 견뎌오며 더욱더 무겁고 신중하게 한 발짝 내딛습니다.
memorare
기억하소서
composed by 정재일
orchestrated by 정재일
piano 정재일
programming 정재일
voice 정은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