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nants of the Fallen [All the Wounded and Broken]
진화(Evolution)는 매력적이고 진취적인 단어이다. 그러나 진화는 뼈를 깎는 고통과 수천, 수만번의 고민과 시도, 실패를 수반함을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뮤지션에게 진화라는 단어는 수만 가지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다듬거나, 새로운 스타일로 노선을 바꾸는 것은 발전과 변화의 영역이지만, 진화의 영역은 변화를 추구하는 한편, 본인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이 어려운 과제를 4년만의 신작인 [All The Wounded And Broken]으로 답을 내린 밴드가 바로 렘넌츠 오브 더 폴른(Remnants of The Fallen)이다.
렘넌츠 오브 더 폴른의 신작 [All The Wounded And Broken]은 전작인 [Shadow Walk]와 비교하여 음악과 연주의 스타일, 앨범과 가사의 전반을 꿰뚫는 정서 등 테크닉과 감성적인 측면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이 앨범의 첫번째 감정은 극한(Extreme)이다. 청자에게 단 1분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블라스트비트와 익스트림 리듬을 때리는 드럼, 비루투오소적인 솔로잉과 메탈코어의 리프, 블랙메탈의 트레몰로 등 메탈의 영역에서 표현할 수 있는 테크닉을 모두 녹여낸 연주 파트가 인상적이다. 드럼 이종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이 앨범에 넣겠다는 각오인 듯, 매 곡마다 입을 다물 수 없는 리듬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악 파트는 여기에 지지 않겠다는 듯 극한으로 달리는 리프와 거의 매 곡마다 기타 솔로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극한을 넘어 브루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이 앨범에서 연주의 정점을 찍는 동시에,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활로로 활용하는 영리한 전개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메인 보컬 박용빈과 베이스&보컬 이승진의 보컬라인은 여전히 파워풀하지만 더욱 강해졌다. 마치 전작들에서의 숙제였던 메탈코어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멤버들의 단호한 의지가 이들을 극한의 연주로 내몰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두번째 감정은 절망이다. 신보를 관통하고 있는 전체적인 가사의 논조는 전작인 [Shadow Walk]와 결을 달리 하고 있다. 전작이 위선과 가식, 잘못된 믿음에 대한 비판과 거기에 맞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이번 신보는 ‘비인간적인 현실에서 느껴야 하는 절망’을 노래하고 있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에 대한 실망감과 냉대함’을 노래하는 Hel, 문명화의 역설을 이야기하는 Hate and Carrion, 파괴되는 자연, 전쟁으로 피폐해지는 사회 등 우리 주변의 모든 상처받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정을 대변하고 있다. 시선은 관조적이며, 그렇기에 더욱 절망스럽게 느껴진다. 전작과 대비하여 더욱 깊어진 감정으로 절망적 상황을 극한의 스케일과 테크닉으로 전개하고 있다. 앨범의 가사를 음미하며 신보의 노래들을 감상하던 도중, 압도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누구나 갖고 있을 황폐하고 음울한 내면을 자극하는 한편, 극한의 곡으로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Writer Unknown에서의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은 신보가 수 많은 공을 들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잔혹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청자의 감성을 때로는 보듬어주고, 때로는 대변해주는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이 앨범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있으며, 신보의 타이틀인 ‘모든 상처 받고 부서진 자들을 위해’라는 명제와 부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메탈/헤비니스 뮤직의 아이콘은 10년을 주기로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크래쉬, 2000년대에는 바세린과 메써드가 각각의 시대의 헤비니스 아이콘으로 등장했었다. 그리고 렘넌츠 오브 더 폴른은 그 후계자 자리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신보이다. 음악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발전을 이뤘고, 가사와 감정은 예전보다 더욱 깊어졌다. 이 앨범은 수작이고, 이들은 진화했다. 더 이상의 수식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Zinman (Drums of Combative Pos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