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솝(b-soap)' 의 새 정규앨범 [짝사랑들(crushes)]
두 장의 선행 EP, [배경들(sceneries)] , [비밀들(secrecies)] 을 통해 정규 앨범의 윤곽을 비춰 보였던 '비솝(b-soap)' 이 드디어 2집 [짝사랑들(crushes)] 을 발표한다.
- 짝사랑의 실패자들
도시의 낮과 밤을 배경 삼은 젊은이들의 만남과 이별 속에서 여러 비밀스런 감정들이 싹트고 교차한다. 언제나 같은 궤도를 맴도는 것 같지만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성찰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게 만든다. 삶은 가식적인 가면 무도회일 수도, 이별의 그늘에서 이별의 문턱까지 같은 루틴이 영원히 반복되는 나선 계단일 수도 있다. 사랑이란 그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일방통행이거나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본 여닫이 창문일 수도 있다. 무수한 시선과 바람들이, 보답 받지 못하는 열정을 허공에 뿌리며 엇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와 새로운 사람과 만남을 갖고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환기하는 것. 우리의 짝사랑의 실패는 말 그대로 보답 받지 못해 짝사랑에 그치고 마는 실패일 수도 있고, 각자의 짝사랑이 하나로 합치되는 해피엔딩으로서의 짝사랑의 실패일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비솝' 이 이 앨범을 통해 그려내는 [짝사랑들] 이다.
- 경계의 교집합들
'크릭(Kricc)' , '로보토미(LOBOTOMY)' , '스타더스트(stardvst)' . [짝사랑들] 앨범의 사운드를 창조한 세 프로듀서들은 힙합의 사운드 작법을 기반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사운드 메이커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비솝' 의 전작 [souvenir] 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버벌진트(Verbal Jint)' 와 마찬가지로, [짝사랑들] 의 메인 프로듀서 '크릭' 은 10곡의 정규 트랙을 제공하여 앨범의 뼈대를 만들어주었다. 힙합 작법 기반의 사운드 위에 내향적인 주제들을 구성할 수 있는 힘은 '비솝' 과 '크릭' 이라는 뮤지션들의 존재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한국 힙합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SNP' 와 'Overclass' 로 활동하면서도, 울타리 밖의 음악적 자양분 섭취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이기에 [짝사랑들] 의 세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 여기에 '크릭' 과 '비솝' 이라는 교집합의 경계선을 넘어선 주제들을 표현하기 위해 힙합의 경계 영역에서 독자성을 추구하는 '로보토미' 와 '스타더스트' 의 사운드 풀이 더해졌다. 이 세계 속에서 '비솝' 은 자신과 게스트 뮤지션들의 목소리를 조합하여 [짝사랑들] 만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한국 힙합 씬의 수위 아티스트의 범주를 넘어 이제는 시대의 대중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버벌진트'는 타이틀곡 "Melting point" 에 참여해 특유의 세련된 보컬 레이어드를 선보인다. 일렉트로닉 음악계의 신성으로 급부상한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Flash Flood Darlings)' 는 영기획 동료인 '로보토미' 의 곡 "Dive into the City" 에서 차가운 전자음과 함께 노래하며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표현되는 지점으로 청자를 인도한다. '비솝' 과 '크릭' 이 각기 멜로디 메이킹과 비트를 담당하며 송라이터로 협업한 일련의 곡들에서는, 다재다능한 전천후 뮤지션 '케이준(K jun)' 과 알엔비 싱어송라이터 '크라이베이비(Crybaby)' , 과거 'Lucy' 라는 이름으로 여러 힙합 뮤지션들의 디스코그래피 중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뉴클리어스(The Nucleus)' 의 싱어 '김다영' 등 음악적 역량이 검증된 게스트 보컬들이 목소리를 보태주었다. 이 밖에도 '로보토미' 의 랩 페르소나 '영국(youngcook)' 을 비롯한 여러 게스트 뮤지션들이 앨범의 적재적소에 포진해 때로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터치를, 때로는 뜻하지 않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 경계의 경계선에서
앨범을 다 듣고 나면 산뜻하게 기억에 남을, 투명성 높은 질감의 노랫말들은 '비솝' 특유의 반골적인 정서가 투영된 산물로, 가장 경계적이다. 앨범의 노랫말들은 어딘가에 존재할 법도 하고 존재하지 않을 법도 하여 오히려 친숙한 인물들의 흐릿한 상을 제시한다. 힙합의 작법과 가요적 감성의 매끄러운 이음매를 지향하면서 뻔한 대중음악의 화법과 구분 짓기, 아종 혹은 이종의 끈질긴 교배, 받아들인 이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장르 음악의 유전적 형질 변화, 국외자로 간주되거나 변절자로 낙인 찍힐 위험을 무릅쓰고도 관철해야만 하는 내적 필요성들의 인식, 협업에 있어서의 타협점과 비타협점, 인간에 대한 불신과 의존 등. 다종다양한 이슈들을 이면에 머금은 노래들에서 특정 연령대, 한정된 유형의 정서, 개인의 개성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아닌 무대를 구성하는 환경적 요소로 한 걸음 물러선다.
[짝사랑들] 앨범은 랩 뮤지션 '비솝' 의 음악적 동기를 형성한 여러 양가적 고민들을 고찰한 결과물로 노랫말과 송라이팅, 그리고 아티스트들 간의 조화로운 협업에 집중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비솝' 자신보다 각각의 곡을 드러나 보이게끔 함으로써, 래퍼의 모큐멘터리적 바이오그래피에 열광하거나 디스코그래피를 통한 리얼리티 쇼를 요구하는 현 힙합씬의 아티스트 소비 방식과는 다른 경계선에 선다.
본 앨범이 듣는 이에게 있어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삶 속의 모든 짝사랑들에 대해 생각하며 숨을 돌릴 수 있는 중간층의 역할이 되어주길 바라며, 두 번째 정규 앨범 [짝사랑들] 이라는 나선계단 위 마지막 단에 선 '비솝' 은 '로보토미' 와의 협업을 보완-확장하는 새 EP를 준비 중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