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이 되지 못한 이방인의 노래 디지털 싱글 앨범 [외골수]
'위버멘쉬'가 무슨 뜻인지 가끔 질문 받는다. 그럴 때마다 별 의미 없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다. 니체의 위버멘쉬 사상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초인쯤 되지만, 완벽한 번역이랄 수 없어서 학계에서는 원어를 살려 ‘위버멘쉬’라고 쓴다… 블라블라…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고, 나도 그쯤 말하다 만다.
어려서부터 꽤 냉소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래도 사춘기 시절엔 제법 경도되어 있던 것들이 있다. 록(Rock)이 나를 매료시켰고 철학, 예술의 각 분야마다 영웅이 한둘쯤은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니체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의 책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간혹 눈에 띄는 시크하고 쿨한 선언들은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위버멘쉬’라는 말도 그랬다. '초인'이라고 번역되어 있던 오래된 책을 읽으며 난 어렴풋이 미래를 예감했다. 교복을 걸치고 원치 않는 삶을 강요 받으며 꾸역꾸역 살아내는 지금은 낙타에 지나지 않지만, 이 굴레에 과감히 도전하여 스스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하는 사자가 될 것이며, 나아가 새로이 탄생하는 아이가 되겠다는 거창하지만 실은 흔한 ‘중2병’스러운 선언을 마음 속에 새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15년 정도가 흐른 후 '외골수'라는 곡을 쓰게 됐다. 사자가 되겠다며 물불 가리지 않고 좌충우돌하는 이십 대를 보냈고, 덕분에 한편 자초하고 또 밀려온 풍파에 시달린 어느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낙타로 태어나 낙타로 삶을 마감하고, 소수가 사자가 되어 체제와 운명에 도전하지만… 소수 중에 대부분은 싸움에 지치고 다쳐 스스로를 낙오자로 낙인 찍고 비관하며 세상의 그림자가 되어가는 장면을 몇 번이고 목격한 이후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전철을 밟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던 어느 날이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싸움이고,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나. 그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싸웠던 것 아니었나… 오래된 회의가 다시 날 삼키고 있었다. 이방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외골수’라 낙인 찍으며 자조적으로 노래한다. '그러니 애써 포기하려 하지마. 좀 더 외로우면 돼.'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는 피지컬을 소유한 ‘슈퍼맨’이 아니다. 이런 비참함과 자조의 강을 수백 번, 수천 번 뛰어넘어 고통과 그늘 속의 자신을 긍정하고 새롭게 정의하는 강인하며 위대한 패배자. 그가 찰나의 위버멘쉬이며, 더 자주는 외골수고, 늙은 사자다.
글. 신동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