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석과 부기몬스터' [굿 맨 벗 블루스 맨]
오늘을 살아가는 블루스의 이야기
20세기 대중음악 거개는 블루스에 뿌리를 대고 있다. 로큰롤에서 힙합까지 블루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음악은 찾기 힘들다. 그래서 당연히 블루스는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음악이다. 블루스는 더 이상 수 십 년 전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Blind Lemon Jefferson)이나 하울링 울프(Howlin’ Wolf)가 침대 위의 검은 뱀을 꺼내놓고 거들먹대거나 밀회를 즐기기 위해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는 삐딱하고 꼬인 혈기의 대명사가 아니다. 블루스는 이제 젊음의 절절 끓는 분노를 폭발시키는 종류의 음악이 아니라는 얘기다. 대신 블루스는 능청맞을 정도로 여유를 갖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냉소가 아닌 따스한 성찰의 시선으로 삶을 노래할 수 있는 음악이 되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블루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의 신비나 초월적인 무엇을 노래하며 젠체하는 종류의 음악이 절대 아니다.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의 음악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깨에 힘을 빼고, 조금은 익살맞게, 조금은 짜릿하게, 조금은 허풍도 더해가며 노래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일생에 다시없을 완벽한, 세상 하나 뿐인 ‘명작’을 만들겠다고 야단을 떨며 무리하는 대목이 없다. 사실 우리네 일생이 그러하지 않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는 매일을 최고의 날로 만들겠다고 악다구니를 부리며 살아가지 않는다. 가끔 그런 시간이 오기도 하지만, 보통의 일상은 사실 단조로울 정도로 밋밋하기 마련이다. 블루스라는 음악은 바로 그 밍밍한 삶을 찬양한다. 동시에 그 맹숭맹숭한 하루하루에 작은 파문을 주는 양념과 같은 존재였다. 토요일 밤 리걸 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비비킹(B.B.King)의 풍부한 전기 기타 소리는 필부필녀의 반복되는 일상을 달래주던 춤곡이었고,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노래는 또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터벅터벅 길을 나서는 아침걸음을 마법처럼 바꿔주는(mojo walking) 힘이었다. 버디 가이(Buddy Guy)가 앨범 작업 과정을 묻자, 단지 “Okay, I go” 할 뿐이라는, 바로 그런 블루스를 이 앨범에서 만날 수 있다.
최항석과 부기몬스터는 스튜디오 아크에서 곽동준 엔지니어와 함께 마치 클럽에서 일상적으로 연주 하듯 녹음을 진행했다. 강박 대신 손에 밴 기타 연주의 진한 벤딩이, 과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목소리의 진심이 울렁울렁 쏟아져 나온다. 베이스(김범식)와 드럼(이진광)의 연주는 최항석의 기타 연주와 노래처럼 물 흐르듯 쏟아지지만 어디에도 흠잡을 곳이 없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의 매일이 새로울 거 없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각자의 내공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블루스가 삶의 음악인 것은 수많은 블루스 무대와 음반 속에 선후배, 동료들이 자연스럽게 잼을 하고 어우러지는 장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항석과 부기몬스터도 엄인호, 이경천(트리퍼스), 김병호(ex 바퀴자국, A10)과 같은 선배 블루스, 블루스-록 아티스트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장면을 만든다. 그런데 이 순간이 저혀 억지스럽거나 선배의 이름값을 이용하겠다는 장삿속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존경과 믿음으로 들리는 것은 바로 그 일상성의 진심이 소리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앨범을 들으며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만일 당신이 블루스 팬이라면 이 음반에 담긴 편안하면서도 내공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 노래하듯 대화하듯 건네는 이야기, 해먼드 올갠의 울림, 순간 각을 잡아가는 드러밍 모두에서 진짜 블루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체스, 델마크, 앨리게이터, 블라인드 피그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던, 일상의 굴곡이 벤딩이 되고, 그루브가 되던 바로 그 블루스 장인들의 음악을 귀에 쏙 들어오는 한국어 가사와 연주로 위화감 없이 울리게 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이 소박하지만 진한 블루스가 한국 블루스의 터를 닦았던 선배들과 유쾌하게 조우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톡톡하게 기억될 거라고. 오늘을 살아가는 블루스,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의 이야기다.
조일동 (음악취향Y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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