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과 불안과 연민의 노래들
홍크(HONK) 정규 1집 [MONOSANDALOS]
(모노산달로스: 한쪽 신만 신은 사람) 앨범
- 성문영 (팝 컬럼니스트)
(낚시용) 제임스 블레이크가 침실에서 킹 크룰 노래로 데모 작업한 듯한 노래들.
(정식으로 다시) 고대 그리스부터 서울시 개롱까지가 이렇게 위화감 없이 연결되는 게 신기하다. 이는 아마도 홍크가 자기 노래 속 불안의 날과 불면의 밤이 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 원형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업고 살아가는 조용한 고통의 짐을, 홍크 자신의 최대한 사적인 언어로 풀어낸 앨범.
- 오승욱 (영화감독: ‘무뢰한’, ‘킬리만자로’ 연출, ‘8월의 크리스마스’ 각본)
왠지 침착해 보이는 동네의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조용히 놓여있는 방에서.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날들을 보내며. 불안과 참담함을 곱씹으며 만든 노래들.
- 김지선 (Harper's BAZAAR 피처 디렉터)
우울한 감성은 더 이상 힙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홍크의 음악을 듣게 됐다.
이십 대의 어느 날을 생각나게 하는 그의 음악은 풍요롭고도 음울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충분히 힙하다.
- 박성환 (서울시립미술관 코디네이터)
홍크의 곡에는 특유의 공기감이 있다. 스푸마토처럼 매우 미묘하게 변화하는 목소리와 기타 톤, 그 기타 톤과 목소리의 레이어가 켜켜히 쌓여 부풀어오른 나른한 대기감 속에 몸과 마음이 일렁인다.
홍크의 공간 안에 들어서면 연속적으로 움직이고 변형되는 관습적 내러티브가 아닌, 과거를 이야기 하듯이 무심히 톡톡 집어 골라낸 오래된 기억의 스틸 컷들이 흩어져있다.
조각조각 모은 기억들은 마치 내 것과도 같이 재현(representation)되어 현재(present)한다. 홍크의 곡에는 특유의 공기감이 있다.
그 신발 한 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홍크(HONK)의 음악을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시 [아이가 아이였을 때]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사운드트랙 속지에서 인용구로 처음 봤던 그 시는 원래의 뉘앙스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팔을 늘어뜨리고 어기적거리고 다니는’ 그 모습에 그로테스크한 멜랑콜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좀 더 매끄러운 전체 번역을 보니 그저 천진난만하면서도 명민한 어린아이의 상태를 잘 고른 비유에 실어낸 것일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처음의 어긋난 이해에는 그 순간만의 알 수 없는 생명력이 있어서 오래 가슴에 남았고, 그것이 홍크의 노래를 들으면서 되살아났다. 예컨대 마르고 젊은 한 영혼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구석구석 오랜 시선으로 쳐다보는 동선이, 분명히 입을 열었지만 불가해한 모음(같은 것)만 들려오는 소리가 촉발한 느낌이었다. 뭐, 이런 세팅이라면 그리스 신화 속 신발 한 짝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굴 소년소녀들까지 호출되어도 어색하지 않다. (후자의 경우 디즈니보다는 팀 버튼 쪽에 더 가까운 노래들이라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앨범은 수술대 위에서 이루어진 우산과 재봉틀의 아름다운 만남까진 아니더라도 어지간히 초현실적이다. 그리고 멜랑콜릭하고 블루지하다.
이 노래들을 만들고 부른 대한민국 서울의 젊은 뮤지션 홍크(aka 안상영)는 다수의 EP 끝에 마침내 내놓는 첫 정규 앨범의 테마를 ‘모노산달로스’로 정했다. 제목도 [MONOSANDALOS]다. 이는 한쪽 신만 신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리스 신화 속 영웅 중 하나인 IASON(이아손)이 노파로 변신한 여신 헤라를 업고 강을 건너다 신고 있던 한쪽 신발을 잃어버린 일화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 테마와 직결되는 [monosandalos]와 [IASON]도 앨범에 수록돼있지만, 홍크의 의도가 더 잘 드러나는 건 [안자려고 안잔게 아니고]에서 ‘무거운 기분을 업고 놀자’ 같은 부분이다. (신을 업은) 압박과 (신을 잃은) 불안이 우리의 실존임이, 뜻밖에도 [사랑가(판소리 ‘춘향가’ 中)]와 모노산달로스의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이다.
컨셉트 앨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신은 앨범에서 꾸준히 언급되거나 연상된다. ‘신을 쳐다보(shoegaze)’거나, ‘닳아 헤진 신발을 못 벗’기도 하고, 이미 남이 된 이를 돌아보고 ‘굳이’ 인사를 건네는 발걸음 역시 한쪽만 신은 듯 어색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건 신발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유도된 감정들이다. 신을 쳐다보려면 고개를 (들기보다는) 숙일 수밖에 없고, 아무래도 벗지 못하는 닳은 신발은 볼수록 가슴이 찡해진다. 신화 속 이아손에게 잃어버린 한쪽 신발은 신이 내려준 징표였던 반면, 홍크에게 한쪽만 남은 신발이란 크게 비극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어지지도 않는, 우리 귀에 늘 울리는 우울과 불안과 연민의 화이트노이즈 같은 것이다.
그래선지 그의 노래들은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다(every line’s a blur). 즐겨 내는 재즈 화음은 그럴듯한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정작 실려 나오는 목소리는―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면―소통의 의지보다 내면의 의미 체계에 충실하다. 발음조차도 그렇다. 앨범에 가사를 실을 만큼 이 노래를 전달하고 싶은 한편으로, 그는 곳곳을 자신만의 코드로 봉인해놓았다.
그러나 이렇게 노래한 사람이 그가 처음은 아니다. 오히려, 홍크의 경우는 (그러고자 하는 사람에 한해) 노래 속 이미지와 음들이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지 간혹 스스로를 흥미롭게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앨범에서 제일 수수께끼 같은 곡은 (모음이라 주장하는 웅얼거림 [vowel]을 제외하면) [양배추와 왕]이다. 원래 ‘양배추와 왕’이란 구절은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해마와 목수 이야기에 나오는 것으로, 홍크가 이 노래를 위해 이미지를 빌려온 디즈니 애니메이션 버전에서는 해마와 목수 자신들이 곧 양배추와 왕이다. 홍크의 말에 따르면 ‘한밤에 불을 붙이고 저녁에 술을 권하는 가사’를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은 평소 억눌렀던 감정이 술이나 음악 때문에 불현듯 의식 위로 치고 올라오는 때가 있음을 이 곡에서 노래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마의 꾐에 빠져 순진하게 물 밖으로 나오는 어린 굴들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런 진행은 결국 굴들에게 닥친 비극적인 운명처럼 그에게는 당혹스러운 고문이 된다.
[양배추와 왕]에는 홍크가 좋아한다는 펠릭스 발로통(Felix Vallotton)의 그림도 언급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거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해마와 목수가 함께 걸었던, 해와 달이 동시에 뜬 해변은 저녁 해변/물가 풍경이 담긴 발로통의 작품 몇 점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거기다 해마가 주워섬겼던 대화 소재 중에는 양배추와 왕 외에 신발도 있었고, 해마를 따라가던 목수가 한쪽 신을 벗어 들고 그 안에 든 모래를 빼내는 장면은 다시금 모노산달로스 테마를 환기시킨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제일 나쁜 종류의 평론가 병에 걸린 의미과다형 독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홍크에게 노래 속 장치와 언어는 결코 사운드 속에 되는대로 집어넣은 충전재가 아니다. 본능적이든 조탁을 통해서든, 그가 고른 언어는 그의 의도의 반영이다. 그게 얼마나 사적인 체계를 통과한 것이든 간에.
수줍고 비밀스러운 규칙에 따라 노래들이 흐르는 와중, [강변살자], [안자려고 안잔게 아니고], [개롱], [어쩌면] 등 예기치 못한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 곡들은 앨범 전반부의 자성적인 트랙들로 홍크를 정의하려던 생각을 고쳐먹게 만든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를 인용한 [강변 살자]와 전술한 [안자려고 안잔게 아니고]에선 3박자(왈츠) 리듬이 새삼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그가 어렸을 적 살았던 서울 동쪽의 동네 이름을 딴 곡 [개롱]은 노이즈 마무리를 빼면 (거의 컨트리 풍으로 들리는) 향수 어린 포크송이다.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혹은 장난감 주마등을 느긋하게 돌리는 느낌이 드는 인상적인 코러스의 [어쩌면]도 귀에 착 감긴다. 이 곡들의 공통점은 홍크의 가드가 상대적으로 내려와 있다는 것이다. 또 한글 가사가 (영어 가사보다) 착실하게 제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모노산달로스라는 큰 테마와 홍크의 사적인 이야기란 작은 편린 사이 경계에 [눈]이 맺혀있다. 예쁘지만 손 닿으면 녹아 없어지는, 다가가고 싶어도 닿을 수 없기에 체념하는 애틋함이 커다란 공명감/공허감과 함께 흐르는 노래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젊은 나이에 왜 이토록 낮은 목소리와 모호한 억양과 억누른 감정을 유지해야 하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아티스트는 어쨌든 자신의 방식을 선택하는 법. 그것은 그의 전략의 일부다. 홍크란 이름도 어감이 맘에 들어 고른 단어일 수도, 옛 연인의 기억을 담은 그만의 표식일 수도 있다. (둘 다 그가 밝힌 이유였다.) 그가 펜더 재규어 기타를 고른 계기가 커트 코베인인지 조니 마인지도 우리는 모른다. (둘 다 아닐 수도, 아예 없을 수도 있다.)
퍼포먼스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남는 것은 노래다. 홍크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 영감을 들여오던 시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만드는 쪽으로 옮겨갔고, 그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들은 계속 축적되고 있다. 사운드만큼 비주얼에도 예민하고, 언어의 비중도 큰 뮤지션이다. 이렇게 축적된 홍크의 곡들이 앞으로 점점 보편적인 얘기를 건넬지, 아니면 더 독자적인 자의식에 몰두할지는 알 수 없지만, [MONOSANDALOS]에서는 지금 들리는 것과 같은 이런 노래들이 남았다. 불안정하고 회한에 차있지만 속으로 삼키는. 그래서 목이 까끌거리고 가시가 돋아도 이내 일상으로 스며드는. 의도치 않은 밤샘과 초대하지 않은 기억, 모호한 웅얼거림과 오래된 내상의 세계는, 결국 그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181025. 성문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