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 먹고, 놀고 먹고 ‘우리, 다 해먹자’
- 우린 잠깐 놀아도 돼, 너 열심히 산 거 미미가 다 아니까!
10년을 응축한 특별한 진심
- 미미시스터즈 위로 캠페인 2탄, 여행 권장송 ‘우리, 다 해먹자’
지난 2018년 결성 10주년을 맞은 미미시스터즈는 위로 캠페인송 [우리, 자연사하자]를 발표하며 큰 화제와 공감을 불러모았다. ‘자살 방지 캠페인송’으로 발표된 이 곡은, ‘SBS 8시 뉴스’와 ‘스브스 뉴스’, ‘중앙일보’ 칼럼에도 소개되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며 유쾌한 위로를 선사했다. 이후 5개월만에 발표되는 미미시스터즈의 두 번째 위로 캠페인 ‘여행 권장송’ [우리, 다 해먹자]는 실제로 큰미미의 퇴사 직후 작은미미가 살고 있는 인도여행을 계획하며 만들어지기 시작한 곡으로, 그동안 서로 열심히 살아 왔으니, '먹고 싶은 거 다 해 먹고, 가고 싶은 데 다 가보자’는 응원과 위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빨간 국물 뚝뚝 '국떡'의 맛...미미가 전하는 위로 한 접시]
빠른 비트가 어깨춤을 추게 한다. 턱이 저절로 앞뒤로 움직인다. 듣기 시작하면 좀처럼 이어폰을 뺄 수가 없다. 운율에 빠져드는 데는 몇 초 안 걸린다. 한국의 독보적인 여성 듀오 ‘미미시스터즈’가 지난 해 데뷔 10주년을 맞아 EP ‘우리, 자연사하자’를 낸 데 이어 올해 두 번째 미니앨범 ‘우리, 다 해먹자’를 발표했다. 특유의 경쾌한 리듬은 위트 넘치는 가사를 만나 상큼한 위로를 전한다.
‘우리, 자연사하자’가 청춘조차 죽음으로 내모는 갑갑한 현실에 절망만 하지 말고 찰나의 즐거움에 충실하자는 희망의 메시지라면, 이번 ‘우리, 다 해먹자’는 그저 ‘잠깐 놀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다 해먹는 것’에 관한 발랄한 제안이다. 여기서 빠지지 않는 키워드는 ‘위로’. 미미시스터즈가 이 두 곡을 ‘위로 캠페인 송’이라고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온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경쟁 사회, 한국. 우리는 일에 매몰돼 반짝이는 삶의 편린을 놓치고 산다. 그러다 지치면 자기만의 방에 갇혀 무너진다. ‘더 열심히 살아야 했었는데!’라고 자책한다. 하지만 미미시스터즈는 ‘너 열심히 산 거 내가 다 아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능청스럽게 노래한다. ‘저렴한 신비주의’를 내세우며 10년 산전수전 다 겪은 미미시스터즈의 위로는 뽀얗고 진하다. 그리고 ‘국떡’(국물 떡볶이)을 ‘다 해먹자’는 음식으로 추천한다.
떡볶이야말로 위로의 솔푸드다. 산새조차 길을 잃을 정도로 깊은 오지 마을 장날에도 떡볶이는 등장한다. 전국 초등학교 담벼락엔 떡볶이 포장마차가 다 있다. 비 오는 날 엄마가 해주는 최고의 간식도 떡볶이다. 어른이 되면 소박하다 못해 저렴한 이 맛을 내팽개치고, 우아한 파스타로 갈아탈 것 같지만, 쉽지 않다. 왜냐면, 우린 이미 혀끝까지 붉고 쫀득한 떡볶이 디엔에이(DNA)가 박혀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 남긴 인장이다. 따스한 추억은 위로가 된다.
빨간 고추장 양념에 떡을 볶는, 지금 같은 형태의 떡볶이는 1953년 서울 신당동에서 장사를 시작한 ‘마복림 할머니’(2011년 작고)를 시작으로 본다. 그 이전엔 빨간 고추장 떡볶이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시의전서](19세기 말)에 나온 쇠고기, 나물, 떡 등을 조려 만드는 고급 떡볶이 관한 기록이 고작이다. 1970년대 쫄면, 라면, 갖은 채소와 떡을 즉석에서 볶아 먹는 ‘즉떡’(즉석떡볶이)이 인기를 끌었지만, 그 이전인 1960년대에 미미시스터즈 노래에 등장하는 ‘국떡’(국물떡볶이)을 파는 집은 있었다. 다만 ‘국떡’이란 말까지 생길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때는 2000년대로 추정한다. 홍익대 먹자골목 등 유명한 상권에서 ‘국떡’을 내세워 크게 성공한 가게들이 생겨나면서부터다.
찰랑찰랑 넘칠 것 같은 국물에 쫄깃한 떡을 퐁당 빠트려 한참 놀게 한 다음 떡에 잔뜩 묻은 양념까지 입안에 쏙 밀어 넣으면 세상 부러운 게 없다. 보드라운 달걀노른자까지 묽은 소스를 만나면 혀는 날개 춤을 춘다. 국떡이 펼치는 맛의 향연은 즉떡만큼이나 화려하다.
그런데 왜 미미시스터즈는 ‘즉떡’(즉석떡볶이)도, ‘궁떡’(궁중떡볶이)도 아닌 ‘국떡’일까?
2017년, 가족 사정 때문에 큰미미와 헤어져 인도에 살게 된 작은미미가 가장 먹고 싶은 한식이 떡볶이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그는 국떡이 그리웠다. 이미 ‘우리, 자연사하자’ 제작 때부터 둘은 국떡에 관한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다.
작은미미가 “뚫어 놓은 떡볶이 집을 알려 달라”고 인터넷 전화라인에 매달려 조르자 큰미미가 “국떡 집으로?”라고 되물었다. 인도에 있는 작은미미가 큰미미 단골집 목록에 올라간 국떡집을 갈수는 없었던 터! 결국 이들은 특별한 계획을 세웠다.
지난 2월, 큰미미는 여행가방 맨 앞쪽에 떡볶이 재료부터 넣었다. 그리고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도 한인 마트에서 떡을 산 작은미미와 만나 국떡 파티를 열었다. 이들의 ‘특별한 계획’은 인도에서 국떡을 해 먹는 것. 인도 향신료의 공격은 집요하고 치명적이었다. 가람 마살라(여러 가지 인도 향신료를 배합한 것)를 넣을까, 말까 갈등했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한 때 무대에 서 있는 위치 때문에 ‘좌미미’ ‘우미미’ 불렸던 이들. 혹시 ‘좌파 미미’ ‘우파 미미’로 오해할까 싶어 ‘큰미미’ ‘작은미미’된 미미시스터즈는 발리우드 나라 인도에서 국떡을 앞에 두고 다시 만났다. 함께 있어야 ‘우리’가 되는 밴드. 이별이 슬프진 않았지만 그리움은 컸다.
인도에서 큰미미는 ‘돌아올 현실은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미미가 준, ‘펼치기에도 아까운 두근거리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2012년 이미 비슷한 설렘을 경험했다. 작은미미가 출산을 앞둬 잠시 활동을 접은 때였다.
당시 큰미미는 혼자 걸었다. 꽤 먼 곳까지 갔다. 도보여행은 이어졌다. 작은미미는 마당 평상에 누워 빈둥거리며 공연 영상을 봤다. 그 때 ‘그냥 쪼금 쉬어도’ 우리 삶은 계속 지속한다는 것을 둘은 알았다. 머뭇머뭇 잠시 망설여도 괜찮았다. 가난한 시간이 스며들어도 두렵지 않았다. 꿀처럼 달고 편안했다. 덧셈보다 뺄셈인 인생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다.
‘우리, 다 해먹자’는 이들의 이런 촘촘한 시간이 알알이 박힌 곡이다. 마지막 소절이 끝나 더는 노래가 안 들려도 눈부신 희망이 느껴지는 이유다. ‘나도 이들처럼 해도 괜찮아!’ 이 노래의 숨겨진 의미다.
참, 국떡의 진짜 미덕을 아시나? 넉넉한 국물에 빠져 헤엄치다가 흐물흐물해진 군만두에 있다. 굳이 떡이 아니어도 된다. 굳이 세상에 나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친구들과 ‘다 해먹으면 된다.’
박미향 한겨레신문 ESC팀장 겸 음식문화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