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아 [무명無名]
“세상엔 풀이 있어야 해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초록 풍경 중에 많은 부분을 이런 풀들이 만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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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1월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들 16가지’를 묻는 물음에 정밀아가 내놓은 대답 중 하나이다. ‘풀’ 이라. 길가 아무 곳, 작은 틈에 싹을 틔우는 풀. 언제 자랐는지, 때론 모자지리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풀. 빼곡한 나무 사이로 잘려 들어오는 옅은 햇빛에도 기어이 뿌리내려 살다 가는 그런 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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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크고 굳건한 나무를 동경하며 노래할 때 정밀아는 풀에 대해 생각해왔나 보다. 1집을 준비하던 즈음부터 써오기 시작한 이 노랫말은 약 5년 지난 2018년 봄이 되어서야 선율이 붙어 완성되었다. 같은 해 “돋보이는 완성도와 깊이 /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비가 담긴 시적인 가사 / 아름답고 잔잔한 흐름 속에 강한 이미지를 노래했다”는 평을 받으며 전국오월창작가요제 ‘대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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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아는 2014년 정규1집 [그리움도 병]을 발표하며 깊이 있는 가사와 선율, 따뜻하면서도 힘 있는 음색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어 2017년 정규2집 [은하수]를 통해 고유의 색채를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나태주의 시에 선율을 붙여 부른 ‘꽃’은 그녀의 음악 속에 깊이 스며있는 연민의 정서와 어우러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밀아의 음악은 스스로에 대한 자조와 회고를 넘어 ‘나와 우리’를 이야기한다. 그저 관망이나 부유가 아닌, 단단한 걸음과 깊은 시선으로 삶을 관통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들을 노래한다. 이번 작품 [무명]은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다가는 존재들을 풀에 비유했다. 그러나 고단한 여생 끝에 흔적 없이 끝나는 ‘삶의 허무’에 대한 이야기가 전연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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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아는 [이른 봄날, 아무 투정도 없이 뿌리를 내린 풀]을 보았고, [건네주겠는가, 깊은 눈길 한번, 사뿐 들꽃을 피해서 조심히 가는 발길]을 살포시 청한다. 이어, [온 산 뒤덮은 푸름은 큰 나무만 아니라, 무심히 밟고 가는 수많은 그냥 풀] 이라 힘주어 말한다. ‘그냥 풀’로 불린다 해도 푸름을 만들고, 마침내 흙과 거름의 역할도 한다. 이렇듯, 만방에 이름을 크게 떨치지 않더라도 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는 안다. 존재에 대한 인정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고 사려 깊은 것 하나에서부터 비롯됨 또한 안다. 허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를 망각한 세상의 모습을 매일 접한다. [이름 없는 날에, 이름 없는 곳에, 이름 없이 살다가 또 이름 없이 간다] 마치 영가의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이 노랫말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무고한 희생과 소외, 무심한 잊음이 없기를 바라는 기도이자 의지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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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은 무게감 있는 호른 솔로로 시작된다. 이어 절제된 베이스와 드럼, 최소한으로 가미된 나일론기타는 정밀아 특유의 ‘비움으로 채운’ 사운드를 만들었다. 그 위로 시를 읽듯 명징한 정밀아의 목소리가 흐른다. 한 자, 한 자 눌러쓰는 글씨처럼 노래는 서두르지 않고, 넘칠 듯 끝내 담담하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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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나로 이렇게 존재하지만 늘 오롯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또박또박 온기 담아 불러준다면, 존재의 선명도를 다시 높여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음악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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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이것과 저것, 또 당신과 나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누군가로 인해 아름답고 반짝였던 순간들, 나로 인해 만들어질 모습들이 어우러져 세상은 굴러간다. 이에 정밀아의 [무명]은 ‘이름 없음’에 대한 슬픔과 허망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을 살았고, 또 살아갈 ‘우리 존재에 대한 찬가’로 묵묵히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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