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이 펼치는 환상곡, 도인(道人)의 록
신중현 / 헌정 기타 기념 앨범
2009년 말, 반가운 뉴스가 전해졌다. 최고의 일렉트릭 기타 제조사인 ‘펜더(Fender)’가 신중현에게 특별 제작한 기타를 헌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신중현의 낡은 빈티지 스트라토캐스터 모델을 기반으로 제작된 이 기타는 스크래치까지 재현한 고풍스러운 검은색 바디와 ‘Tribute to Shin Joong Hyun’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단풍나무 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써 그는 에릭 클랩튼이나 제프 벡, 스티비 레이 본 등 펜더가 기타를 헌정한 몇 안되는 탁월한 기타리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당시 펜더의 글로벌 마케팅 수석 부사장인 리처드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신중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왔고 그를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큰 성공과 명성을 얻었으며 한국 록의 대부로 잘 알려져 있죠... 그는 우리에게 신화와 같은 존재입니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그에 대해 입소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어요. 그가 미국에서 공연을 하면 공연장은 금세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대단한 펜더 마니아로 알려진 신중현에게 이 헌정 기타는 굉장한 기쁨이었다. 물론 이는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라는 개인의 영예를 넘어, 세계 시장에서 변방에 불과한 우리의 록 음악이 더 큰 위상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일이기도 했다. 사실 세계 각지의 골수 음악 애호가들은 오래 전부터 한국 록에 관심을 보여 왔고 그 중심에 늘 신중현의 음악이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맥도널드의 언급처럼 말로만 들어 온 ‘신화’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안타깝다. 역사에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예컨대 1970년대 중반 유신 정권이 길들이기 어려운 음악인들을 탄압하고 뿌리까지 뽑아내고자 열을 올리지 않았다면, 한국의 대중음악 신이 무자비한 심의와 검열의 굴레 속에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애초 신중현이 일군 록 음악의 발판 위에서 록이 건강하게 진화했다면 우리 대중음악은 탄탄히 균형이 잡힌 채 지금과는 사뭇 다른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중현의 이름은 세계 무대에서 베일에 싸인 신비로움이 아닌 위대한 실체로서 제대로 빛을 뿜고 있을 것이다.
펜더는 이를 알아봤다. 하지만 이미 록은 대중의 관심과 거리가 먼 음악이 되어 있었고 신중현은 전설의 영역에 자리한 이름이었다. 다행스러웠던 건 2005년 두 앨범 [도시학]과 [안착]을 발표하고 이듬해 공식 은퇴를 선언한 그가 펜더 헌정 기타를 계기로 다시 무대에 올랐다는 점이다. 그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하여 대학로 소극장과 올림픽공원, 그리고 현대카드 슈퍼 콘서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무대에서 ‘헌정 기타’를 연주했다. 그 사이 양질의 재발매 시리즈로 잘 알려진 미국의 레이블 라이트 인 디 애틱 레코즈(Light In The Attic Records)에서 그야말로 주옥같은 그의 명곡들을 리마스터하여 담은 편집 앨범을, 라이온 프로덕션스(Lion Productions)에서는 신중현과 엽전들 1집과 그가 프로듀스한 김정미의 명반 [Now]를 재발매하기도 했다. 비록 ‘록의 시대’는 20세기와 함께 저물었지만 그의 음악은 뒤늦게 태평양을 건넜고 국내에서도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회자되고 소비되어 왔다. 2017년 버클리 음대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2018년에는 그의 곡들로 구성한 주크박스 뮤지컬 [미인]이 상연되었다.
펜더가 신중현에게 특별한 기타를 선사한 지 어느덧 10년, 놀랍게도 신중현의 새 앨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 ‘헌정 기타’를 기념한 작품집이다. 2019년 현재 그는 우리 나이로 82세다. 보통이라면 벌써 은퇴하여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고 있을 나이다. 지난 10년간의 여러 활동이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그의 가치관과 삶은 나이와 무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앨범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과거에 많은 것을 이룬 고령의 록 기타리스트가 록 음악이 설 자리가 없는 시장에서 굳이 ‘모험’을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던 탓이다. 틀린 생각이었다. 지난 60여 년간 기타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그는 여전히 “기타로 세계를 제패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오랫동안 걸어 온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의 인생이 녹아든 음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14년만의 정규 앨범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영광스러운 기타’를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이 기타로 새로운 연주를 하고 거기에 새로운 창법과 스타일을 싣고 싶었다. 그래서 앨범 제목은 헌정 기타를 위한 작품집이라는 의미로 [SHIN JOONG HYUN for Tribute Guitar]가 되었다. 자신이 남긴 대단한 유산들 중 곡을 골랐다. 히트곡 중심의 선곡이 아닌 지금 이 순간 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곡들이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빗속의 여인]이 유일하다. 하지만 수록곡 8곡이 모두 과거의 흔적은 아니다. 앨범에는 처음 선보이는 신곡 2곡이 실렸다. 흥미로운 부분은 세 아들의 참여다. 신대철과 신윤철, 신석철의 연주 실력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고 이들은 각기 우리 대중음악 신에서 굵직한 역할을 해 왔다. 2012년과 2013년 공연 무대에서 네 부자가 감동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바 있지만 이들이 함께 앨범 작업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 앨범의 의미는 각별하다.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인 장남과 차남은 기타를 잡는 대신 아버지의 서포트를 위해 각각 베이스와 키보드를 연주했다. 다만 신대철은 2곡에만 참여했고 6곡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이는 신중현 밴드를 거쳐 신윤철과 서울전자음악단에서 활동했던 이봉준이다.
신중현 록의 본령은 사이키델릭이다. 신윤철 역시 사이키델리아의 영향하에서 특유의 매력적인 사운드를 펼쳐 온 인물이다. 그래서 앨범을 관통하는 색채는 짙은 블루스 록과 하드 록이지만, 그 바탕에 깔린 고향집과 같은 친근한 사이키델릭의 향취가 시종일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신윤철이 연주하는 해먼드 오르간 탓이다. 대부분의 곡에서 넘실대는 꿈결 같이 아득한 해먼드 오르간의 음색은 꽤나 예스럽지만, 노련한 거장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의 굵고 강한 울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깊은 감흥을 안겨준다. 이봉준의 야무진 베이스와 신석철의 파워풀한 드럼이 이루는 빈틈없는 리듬 위에서 자유롭고 우아하게 춤추는 신중현의 기타는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잊을 수 없는 앨범의 색채를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는 신중현의 목소리다. 앙다문 입에서 툭툭 흘러나오는 듯한 투박한 목소리, 꾸밈없이 읊어 가는 타령조의 창법은 ‘한국적 록’으로 대변되던 신중현 음악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다. 이제 여든둘 노인이 된 그의 노래는 더욱 성기고 엉성해 때로 어색한 위화감마저 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목소리는 마치 모든 걸 초월한 채 가슴을 파고든다. 그의 거친 속삭임은 이 중독성 강한 기타와 오르간과 더없는 조화를 이룬다. 그래, 이건 새로운 경지에 이른 ‘도인(道人)의 록’이다.
1988년 발표되었던 [그동안 / 겨울 공원]의 수록곡 [겨울 공원]과 [그동안]이 첫 곡과 끝 곡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외에 장현이 노래하고 신중현과 더 멘이 연주했던 1972년 작 [안개를 헤치고], 에드 훠(애드 포)의 1964년 데뷔작에 수록된 [빗속의 여인], 김정미의 1973년 앨범 [바람]의 수록곡 [어디서 어디까지], 신중현과 세 나그네의 1983년 유일작 중 [바다]가 새로운 편곡과 연주와 노래로 수록되었다. 두 신곡 중 [사랑해 줘요]는 전형적인 트로트풍 멜로디와 가사로 전개되는 곡이지만 [그날들]은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련한 해먼드 오르간 연주에 실리는 신중현의 나른한 목소리는 휘몰아치는 기타 솔로와 폭발하는 드럼 연주의 향연으로 이어지며 강렬한 도취를 전한다. 앨범이 전하는 마법과 같은 매혹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짜릿한 감동이 이 한 곡에 온전히 담겨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