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위로할 로큰롤라디오식 발라드
녹음부터 믹싱까지 모든 과정을 철저히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DIY 프로젝트
두 번째 싱글 [Punctum]
'로큰롤라디오'가 돌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조이 디비젼의 이안 커티스를 연상케 하는 중저음의 웅얼거리는 듯한 노래는 여전하다. 딱히 별 다른 감정적 동요가 없어 보이는 김내현의 시니컬한 보컬은 그와 상반되는 현란한 연주와 만나 곳곳에 어떤 구멍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강력한 가창력으로써 경쟁력을 두는, 가사 전달의 의미와 감정이 매우 충만하여 다른 해석의 여지를 결코 두지 않는 여타의 가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로큰롤라디오의 노래에서 발생한 그 구멍들은 청중들이 알아서 채운다. '함께 만들어가는 음악'인 셈이다.
'로큰롤라디오'의 신곡 제목이기도 한 푼크툼이라는 개념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롤랑 바르트의 초기 업적인 '저자의 죽음'부터 짚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저자의 죽음'이란 끊임 없이 미끄러지는 의미작용의 연쇄 안에서 저자가 서 있을 자리가 없음을 가리킨다. 죽은 저자의 자리를 바로 독자가 대체한다. 이렇게 되면 텍스트를 독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며 작품의 본질이라는 것 또한 유명무실하게 된다.
이 맥락에서 푼크툼을 살펴보기로 하자. 푼크툼은 완벽히 개인적인 것이다. 바르트가 사망한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고 느낀 소회를 풀어 쓰면서 개진한 그만의 독특한 사진론에 나온 개념으로서 이것은 기술적 용어도 학술 이론적 용어도 아니며 어떠한 말로나 기호로도 결코 설명될 수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며 그것은 차라리 상처로 다가온다. 푼크툼을 지각하는 데는 아무런 분석이 필요 없다. 때때로 추억이 필요할 수는 있다. 보는 이를 '찌를' 수 있는 이러한 요소를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하기란 불가능하며 사진을 보는 사람이 일부러 찾아내려고 애쓰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다면 로큰롤라디오가 신곡의 제목을 푼크툼이라 지음으로써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푼크툼을 갖는다는 것은 사진을 보는 행위에 한하며 그 외의 영역에서는 이야기될 수 없다. 이 곡이 푼크툼의 체험에 대해 노래하는 것이라면 말은 될 수 있다. 앞서 말한 로큰롤라디오 특유의 구멍들처럼, 이 노래에서 말하는 사진과 사진 속의 너는 기의 없는 기표에 불과하다. 헤어진 애인이든 죽음으로 보낸 친구이든 누가 되었건 듣는 이 마음대로 대입할 수 있다. 때때로 추억이 필요할 수는 있다.
- 김내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