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STAGE. 인간의 음악
록 음악은 어디에서 왔을까? 사실 이런 질문은 뜬금없다. 록 음악은 블루스와 컨트리에서 왔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록은 아프리카에서 왔고, 유럽에서 왔으며, 미국에서 왔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음악은 어디에서 왔고, 유럽의 음악은 어디에서 왔으며, 미국의 음악은 어디에서 왔을까. 도돌이표 같은 질문을 다시 던져보는 이유는 물론 '줄리아드림'의 음악 때문이다. '줄리아드림'의 음악에는 우리가 록이라고 이름 붙인 특징들, 가령 지직거리고 지글지글거리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렉트릭 기타 소리, 무겁게 내리치는 드럼 소리, 고함치는 보컬의 노랫소리가 함께 있다. 그 소리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소리의 총체로서 '줄리아드림'의 록 음악은 묵직하고 어지러우며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줄리아드림'의 록 음악은 아니 록 음악은 묵직함과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에서 출발한 것일까. 그럴 것이다. 록의 기원이었던 음악들 속에서도 묵직함과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은 이미 기세등등했으니 말이다. 사실 자연 속 천둥과 벼락, 태풍과 장마는 언제나 기세등등했고, 삶에 있어 운명과 죽음 역시 기세등등해 인간은 항상 묵직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 음악의 악기와 주법과 테크놀로지가 없었다면 록은 '줄리아드림'이 재현하는 방법론과 사운드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하지 못했을 것이며, 존재와 세계의 가장 붉고 깊숙하며 노곤한 실체를 이처럼 장렬하게 들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줄리아드림'의 음악이 재현하는 것은 록이 고투 끝에 완성한 자신만의 방법론과 사운드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고수하고 엄호하는 인간다움이다. 오래전, 아니 오래전의 오래전의 오래전 음악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가 다시 지금 이 곳으로 돌아와 부릅뜬 눈으로 자신과 세계를 마주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그 옛날의 음악들도 '줄리아드림'의 노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줄리아드림'은 "만선"에서 "하늘 아래 바다 삶이 춤추는 내 지친 몸이 나서네 생의 바다로 / 내 안에 담긴 작은 생명 내게 기대네 / 노를 저어 나선다 삶의 바다로 / 바다에 맞서 떠나간 내 아비의 혼 / 허무한 생은 만선이 되어 돌아왔네"라고 노래한다. 일견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와 다르지 않은 비장하고 고독한 목소리이다. 우연처럼 주어진 생이라는 굴레 아래 살아가며 굳은 의지를 다지지만 끝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미약함에 대한 절망과 슬픔이 수천 년을 뛰어넘어 다시 노래가 되고 있다. 세계는 영원히 반복되고 인간은 번번이 패배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음악이 있다. 음악은 인간을 기록하며 스스로를 인정하고 복기하면서 위로한다. 그리고 음악은 다시 도전하고 꿈꾼다. 음악은 포기하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 '줄리아드림'이 선연한 조명 아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만선"을 노래하고, "Casus Belli"를 노래하며, "가위"를 노래할 때 숙명과 패배, 불안과 슬픔마저 한없이 질기고 아름다워진다.
팀의 이름을 제공한 핑크 플로이드가 그러했듯 '줄리아드림'에게도 음악은 단순한 유희나 안락의 도구가 아니다. 이들에게 음악은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방법이자 인간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탐구와 모색, 고뇌와 응답이다. 스스로에 대한 대결과 투쟁이고, 자신 밖에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것들과의 갈등과 불화, 그로 인한 필연적인 불안과 전투의 기록이다. 살아 있는 내내 인간은 자신과 싸우고 세계와 싸운다. 삶은 개전(開戰)의 기록이다. 그래서 '줄리아드림'의 두 번째 곡 "Casus Belli"는 바짝 날이 선 사운드로 내려치고 몰아치며 개전을 선언한다. 조명이 온통 붉고 어둡게 비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지 않겠다는 집념처럼 노래하는 박준형의 목소리는 때로 위악적이고 주로 고독하며 처절하다.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이 주도하는 현란한 사운드의 변박과 인터플레이는 바로 그 전투의 기록이다. '줄리아드림은' 전쟁 같은 생의 의지를 나른한 고음과 요란한 사운드만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질박한 세 연주자의 연주가 포복하고 소용돌이치며 만들어내는 록 사운드는 인간의 자존 의지를 록 뮤지션의 손과 발과 목소리로 대행하는 숭고한 의식이며, '줄리아드림'의 농익은 음악을 만만세 표출하는 자신만만한 굿판이다.
'줄리아드림'은 "Casus Belli"에 이어 "가위"에서 다시 한 번 솟구친다. 가위눌림을 표현한 곡 "가위"는 그 아득하며 숨 막히는 순간을 재현하며 '줄리아드림'이 추구하는 사이키델릭한 에너지를 아낌없이 드러낸다. 낮고 음산하게 깔리는 리듬 파트의 연주와 보컬이 창출해내는 사이키델릭한 에너지는 강렬한 록 사운드와 어울려 혼곤한 서사를 나른하지 않고 자유롭게 뿜어냄으로써 '줄리아드림' 음악의 차이와 개성에 도달한다.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소리를 어떻게 연결해 자신의 음악적 서사를 구현하는지가 음악의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줄리아드림'은 11분에 이르는 대곡 "가위"를 통해 자신들이 록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체화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순간의 사이키델릭함에 국한되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능수능란한 창작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음악을 통해 아름다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고통과 불안마저 즐기게 하는 음악과 인간의 위대함. 그 중심에 '줄리아드림'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