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진 [나무가 되어]
-늘 거기 있는 창가의 노래-
평범하고 정갈한 창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의 절반을 시선의 방향에 기댈 만큼의 크기
그 창 밖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어야 한다.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잎이 나고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달고 또 잎을 떨구는 그런 나무 말이다.
이제 집은 너무 높아지고 숲은 멀어져 그런 나뭇가지에 한 나절 시선을 매어두기 쉽지 않겠지만,
사실 이런 창은 한때 모두가 무심히 지나칠 만큼 흔한 것이었다.
그런 창가에서 시시때때로 비어있는 시간을 보내는 일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조동진의 노래는 ‘창’과 같았다.
어디 있던가 하다가 늘 거기 있었고,
무엇이 보이나 눈을 돌려보면 또 텅 비어 있었다.
텅 비어있나 하면 또 심심한 듯, 미묘한 듯 무언가 일렁이고 있었고,
그것이 바람인지, 향기인지, 빛인지 그림자인지 생각하다 보면
훌쩍 시간이 가는 늦은 오후 같았다.
“나는 거기 다가갈 수 없으니 / 그대 너무 멀리 있지 않기를”
- 나무가 되어
그 어느 세대 보다 격동의 시절을 살아왔을 터였다.
예술의 세계도, 노래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아 이런 저런 흐름들이 바삐 지났다.
그것들을 모르고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보다 많이 듣고, 깊이 대화를 나누고, 배움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결벽스러울 만큼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물리치고 외로워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언제나 그 곁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로 심심하지만은 않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우리는 저마다 고독했고, 길을 잃었고, 좀 헤매기도 했다.
그가 천천히 기타를 집어 넣었다가 다시 꺼내는 긴 시간 동안.
“표정 없는 기다란 하루 / 길이 없는 숲의 날들 / 시간 아닌 시간 속을 지나는 바람”
- 그렇게 10년
왜 창 밖은 비어 있을까.
누군가 떠났기 때문이다.
무언가 잃었기 때문이다.
이 앨범 전체를 바쳐 이야기하고 있는 상실은,
그 진득한 작별 인사는
한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이므로,
하나의 시절이므로,
긴 기억이므로,
겹쳐진 또한 여러 겹의 삶이므로,
빈 것은 숨이 멎을 적막을 가져오지만
그 고요의 수면 아래는 소용돌이 같은 되새김이 가쁘고 절박하다는 것을 안다.
“그날은 아픔도 멎어 버린 / 바람마저 잠든 오후 / 연기처럼 사라져간 / 그대 잔잔한 숨결”
- 그날은 별들이 (Farewell)
공백에 찾아 오는 기억의 여행.
허기를 이야기해도 따뜻하기만 한 기타현의 멜로디가 정겹다.
장필순, 박용준, 오소영 그리고 조동익 - 가까운 목소리들이 함께 바람을 만들어낸다.
1970년대를 실제 살아 온 사람들에게는 먼 기억이겠고,
그 시절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어떤 원형적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그의 동생이자 이 음반의 편곡자이며 사운드 디자인을 하고 있는 조동익의 음성이
과거와 현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인공음과 소음 가운데
기타 아르페지오에 목소리를 실어 함께 넘실거리며 유영한다.
“그래 그때 / 그때 우리는 떠도는 바람이었고 / 그래 그때 / 그땐 누구나 구르는 돌이었네"
- 1970
이윽고 그가 쓴 곡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낭만적인 비유가 등장한다.
[천사]
가장 순수한 질감의 목관 악기들이 노래하다 장엄한 현이 비장한 엘레지를 연주한다.
박용준과 박인영이 만든 이 깊고 숭고한 하모니는
일몰의 제주, 애월의 풍경을 담았던 조동진의 사진들, 엘가의 교향곡을 떠올리게 한다.
천사와도 같은 존재에게서 그가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은 어둠, 눈부신 어둠이다.
“창 너머 어두운 풍경 /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 / 멀리 불을 켜는 바다 /그 눈부신 그대의 어둠 어둠”
- 천사
무심한 창가에서 얼마나 많은 일몰을 보았고, 얼마나 많은 여명을 보았을까.
그래서 비어 있는 창을 채우는 것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는 것,
사라진 곳에도 남겨진 무엇들을 되뇌었을까.
빛과 어둠, 바람과 향기 같은 것이 결국 우리가 남겨야 하는 것임을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밤은 깊었어도 / 길을 잃은 게 아니듯 / 날은 밝았어도 / 빛을 잃은 게 아니듯”
- 향기
험하게 비가 긋는 밤에도, 그는 이렇듯 웅얼거리듯 끝내 노래한다.
20대때 이미 긴 생을 살아버린 것 같은 감각으로 노래했고,
백발이 되어서는 노련하고 철든 어른은 결코 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으로 노래한다.
하지만 그 긴 세월이 어제처럼 한결같다.
차분하지만 끝내 어쩔 줄 모르는 이 조용하고 격렬한 시간.
“달려 가는 불빛들 / 많지 않은 시간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 무슨 생각 해야 할지 몰라”
- 이날이 가기 전에
그 평범한 창가를 오래 잊었다면, 번쩍이는 빛과 멀리 펼쳐진 장관을 찾는 데 긴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는 언제나 거기 걸려있던 창을 다시 찾아갈 때다.
그 곳에서 언젠가 그랬듯이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을 좀 보내면서
허공을,
지척을,
나무를,
다시 바람을
오래 쳐다보면 어떠한가.
“공허의 방”을 지나 다다른 “꿈의 창가”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조동진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그런 “버려진 시간” 안의 일일 것이다.
버려진 것은 버려지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꿈 속의 꿈 / 꿈 속의 꿈 / 섬 안의 섬 / 섬 안의 섬 / 푸른 빛 속을 지나 / 어둠의 바다를 지나 /
우리 처음 만나기 이전으로 / 다시 돌아가는 길”
- 섬 안의 섬
(글쓴이: 신영선, 2016년 가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