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계속 부르고 싶었어요."
그가 부르는 노래는 인기가 없었다. 미8군 무대. 동료 여가수들은 소울이나 팝을 부르며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그는 오로지 재즈만을 고집했다. 미군들이 동료들에게 보내는 환호의 크기는 그의 무대에선 늘 작아졌다. 나이트클럽에서 재즈를 부르면 그 뒤론 같은 무대에 서기가 어려웠다. 시대의 반영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음악시장에서 재즈의 인기는 이미 쇠락해 있었다. 록과 팝과 흑인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꽤 오래전이었다. 그런 유행의 흐름에서 '재즈 싱어' 박성연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계속 재즈를 부르고 싶었다. 마음껏 재즈를 부르고 싶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쏟아 붓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재즈 클럽을 열었다. 1978년의 신촌이었다. 클럽의 이름은 야누스. 영문학자 문일영이 추천해준 이름으로, '시작의 신, 보호의 신'이란 뜻에서 착안해 재즈클럽의 시작과 함께 보호해달라는 마음을 담아 야누스를 택했다. 과거와 미래를 본다는 '양면성'의 의미도 마음에 들었다.
야누스에서 그는 원하던 대로 날마다 재즈를 불렀고 날마다 재즈를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반복해 말하지만, 1978년이었다. 박성연과 야누스 멤버들이 '재즈 1세대'로 불리는 것처럼 이들이 한국 재즈의 실질적인 시작이었다. 재즈의 불모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한국 땅에 박성연과 야누스 멤버들이 이제 겨우 재즈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재즈는 당시 한국에서 레코드판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음악이었다. 처음에는 팀을 꾸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악보를 구하기도 어려워 멤버들과 함께 하나하나 악보를 따 직접 만들었다.
그렇게 채보하고 편곡한 곡들을 날마다 부르고 연주했다. 관객이 있건 없건 늘 무대에 올라 재즈를 부르고 재즈를 연주했다. 1990년대 한 드라마의 인기와 고급스럽게 포장된 이미지 때문에 한때 재즈의 위상이(혹은 허상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박성연과 야누스는 같은 자리에서 노래하고 연주했다. 매달 가진 정기연주회만 300회가 넘었다. 처음 신촌에서 대학로로, 다시 교대로 야누스의 간판은 계속해서 옮겨 다녀야 했지만 그 공간 안에서 울려 퍼지던 재즈는 한결같이 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37년, 13,500일이 넘는 시간이었다.
"제가 야누스에서 5년 가까이 연주했는데, 그 전에 클래식이나 키스 자렛 이런 것만 듣고 있던 애가 갑자기 스윙이나 그런 음악이 나오니까 못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선생님들이 저를 나무라거나 그것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항상 연주 좋았다고 하고, 늘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좋은 것을 잘 드러나게 해주셨던 것 같아요." (임인건)
열다섯, 열여섯 살 무렵이었다. 우연히 작은누나가 치는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를 들었다. 우연이었지만 운명과도 같았다. 늘 작은누나가 피아노를 치는 걸 들어왔지만 그날만은 특별히 그 멜로디가 귀를 사로잡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멜로디가 계속 떠올랐다. 처음으로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소년은 '비창'의 악보를 구해 무작정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비창'을 끝까지 치는데 꼬박 2년 반이 걸렸다. 베토벤에 이어 모차르트를 쳤고, 쇼팽을 치고 드뷔시와 라벨과 버르토크를 쳤다.
무언가에 씐 것처럼 계속해서 피아노만을 쳤다. 집에서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하자 동네에 있는 교회에 가서 피아노를 칠 정도였다. 20대 초반에 만난 키스 자렛은 또 다른 세계였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2년 동안은 피아노를 치지 않고 키스 자렛의 음악만을 반복해 들었다. 1985~6년 즈음 최성원(들국화)의 소개로 한국 포크의 거목인 조동진 밴드에 키보드 연주자로 합류했다. 이때 처음 독주가 아닌 합주를 처음 해보았고, 그 뒤 트럼펫 연주자 강대관의 소개로 야누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야누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이 알고 있던 재즈가 아주 작은 일부이고, 그보다 더 큰 재즈가 있고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는 걸 야누스를 통해 알게 됐다. 이제껏 하지 않았던 음악을 한다는 것 또한 그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다. 분명 감성적인 부분이 달랐고 야누스 밴드가 들려주는 음악 사이로 들려주는 키스 자렛 같은 피아노 연주가 이질적이라는 자각도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색깔이고 자신의 음악을 지탱해주는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야누스의 피아니스트라는 자부심이 컸다.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을 지키며 그렇게 야누스를 통해 피아니스트 임인건은 성장할 수 있었다.
"임인건 씨가 곡을 써준 것이 요즘 살아가는 힘을 줘요. 지금은 병원에 있지만, 이번 녹음을 통해서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죽는 날까지 노래하겠다는 소망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박성연)
지금까지 야누스와 재즈 1세대에 대한 조명은 종종 있어왔다. 임인건은 1세대와 함께 연주하며 야누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해왔지만 그 조명에서 다소 비껴나 있었다. 1세대에 비해 어린 나이, 그리고 1.5세대로 분류되는 애매한 위치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야누스에 대한 추억과 애정을 품고 음악 활동을 해왔다. 제주에 내려가기 전까지 25년간 꾸준하게 야누스 무대에 서왔다. 제주에 정착한 뒤론 야누스의 선배들을 제주에 모셔 함께 공연을 하며 야누스의 기억을 살리려 했다. 2015년, 클라리넷 연주자 이동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성연 역시 재정적인 문제로 야누스를 정리하고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인건은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야누스를 기억하는 앨범을 준비했다.
믹싱 작업만 끝난 채 미리 건네진 곡들의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인상적이었던 건 노래의 가제들이었다. 'Mr. 김수열'과 'Mr. 이동기' 같은 제목의 곡들이 있었다. 김수열의 테너 색소폰과 이원술의 베이스 연주만으로 이루어진 'Mr. 김수열', 그리고 임인건의 피아노, 허여정의 드럼과 함께하는 이동기의 클라리넷 연주가 담긴 'Mr. 이동기', 임인건은 야누스 시절의 기억과 함께 '선생님'이라 부르는 선배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곡을 써내려갔다('Mr. 김수열'은 가제 그대로 ''Mr. 김수열 '로 제목이 정해졌다). 이제 김수열, 이동기, 최선배 등만이 남아있는 1세대 연주자들의 빈 자리는 젊은 연주자들이 채웠다. 이원술이 모든 편곡과 베이스 연주를 맡았으며 오정수(기타), 허여정(드럼), 임주찬(드럼) 등이 참여했고 배선용(트럼펫)과 김지석(색소폰) 같은 젊은 관악기 연주자들도 소리를 보탰다.
앨범을 들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건, 임인건의 음악들이었다. 그의 음악은 그가 지금껏 만든 앨범들 가운데서 가장 재즈의 색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분류돼왔지만 늘 재즈의 색이 짙었던 건 아니다. 그의 첫 앨범에는 '뉴에이지'란 수식어가 붙기도 했고, 그 자신도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실험해왔다. 이 앨범에서 그는 처음 정기연주회를 함께했던 5년간의 야누스를 추억하며 계속해서 스윙한다. 이전의 개인 앨범들이 자그마한 스윙을 품고 있었다면 그는 선배들과 함께한 이 앨범에선 그때 그 시절처럼 크고 즐겁게 스윙한다. 그 안에 임인건 특유의 서정과 근원의 포크적인 정서가 여전히 명징하게 자리하고 있는 건 물론이다.
야누스 멤버들도 앨범에 많은 공을 들였다. 박성연은 일주일에 이삼일은 병원을 나와 자택에서 노래 연습을 했고, 몸이 안 좋을 때 노래를 녹음한 이동기는 지금 부르면 더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다며 연신 아쉬워했다. 박성연이 부른 발라드 '바람이 부네요'에는 인생을 살아온 이가 들려줄 수 있는 깊은 울림이 담겨 있고, 이동기가 다시 부른 '하도리 가는 길'은 그 동안 이 노래를 불러온 장필순, 요조, 강아솔과는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준다. 두 곡 모두 아름답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노래들이다. 앨범의 시작을 여는 'I'll Remember (이판근)'은 야누스의 이론가였던 이판근을 기리는 곡이자 이판근이 임인건과 함께 만든 곡이다. 재즈 1세대가 만든 이 현대적인 스타일에 감탄하며 시작한 감상은 김수열과 이동기, 최선배가 모두 참여한 '야누스 블루스'로 끝을 맺는다.
37년간 운영되던 야누스는 2015년 디바야누스로 이름을 바꾸고 후배 재즈 가수 말로가 운영을 맡았다. 37년 동안의 어려움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성연은 혼자 홍보를 하고 후원자를 모았으며 외부 행사를 통해 야누스 운영을 해왔다. 몇 해 전 야누스를 유지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모아온 재즈 바이닐(LP) 천여 장을 팔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아마도 그는 헌신이란 말을 부정하겠지만, 그는 재즈를 위해, 야누스를 위해 헌신해왔다. 얼마 전 만난 자리에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야누스를 지키고 싶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처음 야누스를 열었을 때의 이유와 같았다.
"노래를 계속 부르고 싶었어요."
-대중음악 평론가 김학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