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양 [소음의 왕]
멋지다. 앨범을 돌려 듣고 나도 몰래 한숨처럼 내뱉었다. 스스로도 놀랐다. 새 음악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멋지다는 감탄사를 입에 올린 게 얼마만이던가.
물론 아무리 길어도 전자양이 우리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기간 보다는 짧을 테지만 말이다. 8년, 자그마치 8년이다.
총 20곡, 재생시간 70분이라는 광기 어린 볼륨의 두 번 째 앨범 [숲] 이후 [소음의 왕]을 내놓기까지, 갓 세상의 빛을 본 젖먹이가 처음으로 학교 문턱을 넘을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요즘 뜨는 밴드들의 신상명세를 줄줄 외는 음악 마니아의 입에서 ‘전자양이 누구냐’는 질문이, 소싯적 팬들 사이에서 ‘살아는 있냐’는 인사가 대세가 된 것도 과히 이상할 건 없었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이 시간의 누적은 하지만 앨범을 듣다 보면 절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설득력을 담보한다. 지금의 전자양이 되기 위해 과거의 전자양은 꼭 그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소음의 왕]을 통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전자양은 더 이상 한 때 우리가 사랑했던 축축하고 여린 비트 위를 흐느적대던 반투명한 소년이 아니다.
시선을 한참 위로 올려야만 보이는 보다 거대하고 기묘해진 5인조 완전체다.
정식 멤버 영입 전부터 세션으로 활동하며 산전수전을 함께한 프렌지의 유정목과 윤정식이 사운드의 틀을 잡고, 마이티 코알라의 정아라와 브로콜리 너마저의 드럼 류지가 리듬 파트를 든든하게 받친다. 비로소, 밴드다.
믿음직한 동료들을 등에 업은 전자양의 음악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인트로를 포함해도 다섯 곡,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면 짜도 너무 짠 숫자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할 정도의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
굳이 장르로 나눠 설명하기 보다는 골방에서 양지로 막 뛰쳐나온 인디 팝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노래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앨범을 이리저리 날뛴다.
지난 4월 발매했던 선행 싱글 ‘쿵쿵’으로 살짝 맛볼 수 있었던, 그 누구도 아닌 전자양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전자양식-포크-일렉트로-노이즈-펑크의 세계.
짧은 인트로 ‘거인’ 뒤로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첫 곡 ‘우리는 가족’은 전자양 밴드의 라이브를 한 번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더없이 반가울 트랙이다.
매번 제 정신이 아닌 라이브로 관객들을 지금껏 없던 차원으로 날려 올리는 전자양의 장기가 거침 없이 발휘된 곡이기 때문이다.
단 여덟 마디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조였다 풀었다 흔들었다 우두커니 섰다 쉼 없이 청자를 들었다 놓는 특유의 재주는 ‘생명의 빛’, ‘소음의 왕’으로 차곡차곡 이어진다.
난해한 구조에 현기증이 밀려오려는 순간마다 선명해진 이야기와 달콤한 멜로디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 어느 한 순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마치 다리와 눈이 하나뿐인 겁쟁이 유령이나 폴카 댄스를 좋아하는 덩치 큰 괴물과 신나게 뛰어 노는 것처럼 정신 없이 소리치고 발을 구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곡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에 닿는다.
심오한 제목과는 다른, 전자양식의 기묘하고 뭉클한 인디 러브송이다.
‘꿈 속에서도 뛰어 들 수 있게 모래를 털지 않고 잠들겠다’는, ‘두려움이 나의 심장을 꽉 쥘 때 사랑한다고 너에게 말하겠다’ 외치고 또 외치는 후렴구는 검정치마와 함께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우겠다’던
젊은 함성을 다시 한 점으로 모으기에 부족함 없는 낭만이다.
그 다짐에 뒤이어 이 작은 앨범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건 오로지 커다란 파도소리뿐.
평화롭기 보다는 발 아래 놓인 위태로운 세계를 뒤엎을 기세로 밀려왔다 다시 사라지는 그 소리에 몸을 맡긴 채 전자양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아, 아직 얘기하지 않았던가. [소음의 왕]은 전자양이 연이어 발표할 세 장의 앨범 가운데 첫 번째 이야기다.
앨범이 끝나고도 한참 뒤까지 이명처럼 남은 파도 소리에 기대어 아직 남은 두 번의 감탄과 환희를 기다린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댄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