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악단 (Non Alcoholic Orchestra) [8호]
비행기가 가고 장마가 온다. 맑은 하늘 가르면서 비행기가 날아가고 갈라진 하늘 사이로 비가 쏟아진다. 오라는 사람은 오지 않고 가려는 사람은 가지도 못한다. 차라리 잊으라고 말을 하지. 운명은 심술궂게 비를 뿌리고, 그래도 닿고 싶어 빗속을 서성대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의 몫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비행기는 너무 멀리 날아갔다. 장마는 이제 막 시작됐다. 그런 거다. 다 그런 거다. 그저 어떤 시인의 시 구절만이 작은 위안이 되어 줄 뿐. '비가 온다, 비가 와도/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금주악단의 여덟 번째 싱글 [8호]는 하릴없는 기다림의 노래들이다. 이제는 끝이 났다고 믿고 살았는데 어느 날 비를 맞고 살아나는 기다림의 노래들이다. 다 말라서 파삭 부서진 줄 알았던 기다림이 물을 먹고 설핏 형체를 띤다. 장마가 계속되면 기다림의 몸집은 점점 불어나겠지. 기다림의 첫 번째 날만큼은 아니겠지만.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던 거다. 끝날 수 없었던 거다. [8호]는 비행기를 노래하고 장마를 노래한다. 다른 걸 노래하는 것 같지만 결국 둘 다 같은 통속이다. 비행기는 너무 멀리 날아가고 비는 너무 오래 오니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장마 끝의 어느 날 먹구름들 사이를 가르고 비행기가 날아온다면 모를까.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8호]는 하릴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노래들이 아니다. 사실은 기적을 기다리는 노래들이다. 기다리면 꼭 돌아온다고 믿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노래들이다.
1. "비행기, 날아가네" - 이 노래는 십 몇 년 전에 만들어 졌고, 편곡과 녹음은 이년 전에 마친 상태였다. 금주악단의 첫 싱글 [1호]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금주악단 초기 공연들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노래가 길어서 적당한 때를 찾다가 이번 싱글에 싣게 됐다. 처음 완성한 버전을 그대로 두고 보컬만 새로 녹음했다. 쓰리 코드와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 기승전결의 노랫말. 비행기가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는 듯한 사운드 스케이프. 이 노래는 쉬운 듯 복잡하고 여린 듯 강하다. 기다림의 속성이 늘 그렇듯이.
2. "장마" - 이 노래는 일 년 전쯤 서초동 창고에서 연습 중에 즉흥으로 만들어 졌다. 권성모는 아이폰에 저장돼 있던 녹음을 꺼내 세 개의 다른 편곡 버전을 만들었다. 각각에 맞춰 보컬 녹음을 해보고 나서 그때 그 느낌을 그대로 살린 어쿠스틱한 버전을 선택했다. 이소연이 즉흥으로 불었던 하모니카 소리도 새로 살려 냈다. 노랫말도 그때 김재록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을 최대한 살려 다듬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이전의 금주악단 즉흥곡들-'아하! 천국의 계절'과 '형! 죽지마'-보다 훨씬 더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기다림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원형에 대한 갈망 같은 것. 그런데 그날 비가 왔었던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문득 기다림의 정서가 환기됐고, 뒤따라서 자연스레 비라는 말이 발화됐다는 것. 그러면 된 거다. 비가 안 와도 기다리는 자는 비에 젖는 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