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이어온 스위스의 클래시컬 고딕메틀 밴드 LACRIMOSA 그들의 11번째 앨범 [Revolution]
편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특정 소수를 겨냥한 극단적인 메틀 장르로 분화되던 90년대 중후반의 익스트림 메틀을 지금 이 시기에 되돌아보면, 발생 초기에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에너지가 떨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때때로 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사운드의 변신을 시도하면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음울한 고딕메틀 밴드 시어터 오브 트래저디(Theater Of Tragedy)가 어느날 갑자기 일렉트로니카를 수용하면서 쿵쾅대는 클럽음악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2000년대 들어 변화한 익스트림 메틀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다. 영국의 고딕메틀 밴드들도 이제는 과거의 고스/고딕 성향 대신 일반적인 록 밴드처럼 평범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팬들에게 여전히 인기 있는 밴드 라크리모사라면 오랜 팬이나 새로운 팬이나 그들의 음악에 대한 감상은 동일하다. 예상 밖의 시도를 했다고 해도 여전히 ‘전형적인’ 라크리모사 사운드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래시컬 고딕메틀 밴드 라크리모사는 1990년에 밴드의 핵심 틸로 볼프(Tilo Wolff)가 「Clamor」를 발표하면서 시작했다. 데모 버전 앨범이 아닌 정상적인 음반 활동을 시작한 건 이듬해 틸로 볼프가 라크리모사의 앨범 발표와 배급을 위한 레이블 Hall of Sermon을 설립한 시점이다. 1991년에 발표한 라크리모사의 데뷔 앨범 「Angst」,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Einsamkeit」는 우리가 기억하는 라크리모사의 음악과 많이 달랐다. 고스라는 뿌리는 같지만 좀 더 더 근원적인 펑크 사운드를 수용한 음악이었으니까. 이런 라크리모사 사운드가 ‘전형적인’ 라크리모사 사운드를 갖기 시작한 건 세 번째 앨범 「Satura」(1993)부터였다. 펑크에서 영향받은 고스보다는 당시 세를 넓혀가던 익스트림 메틀의 중요한 지류였던 고딕메틀을 라크리모사의 음악 속에 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1993년이 되면서 안네 누르미(Anne Nurmi)가 키보드를 담당하는 정규 멤버가 된 것이 밴드의 음악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두 장의 앨범에서 소수 매니아들만 환호할 것 같은 매니악한 솔로 프로젝트가 여전히 틸로 볼프의 음악성향이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밴드 형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서히 라크리모사의 음악으로 변화해가다 확실하게 고정되기 시작한 건 유럽을 중심으로 한 폭넓은 곳에서 1995년 앨범 「Inferno」가 대성공을 거뒀다. 히트곡을 만들어내려는 의도가 보여지며 전형적인 라크리모사의 음악과 벗어나긴 했지만, "Copycat"의 히트도 라크리모사가 유럽에서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이후 라크리모사는 클래식과 고딕메틀, 그리고 독일어와 영어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언어 측면에서도 활용의 폭이 큰 라크리모사 스타일의 클래시컬 고딕메틀을 연주해왔다.
그것이 벌서 20년이나 되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1991년에 발표한 첫 앨범 「Angst」 이후 20년이 지났다. 라크리모사의 11번째 스튜디오 앨범 「Revolution」은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라크리모사의 20년을 기념하는 앨범으로 봐도 무방하다. 밴드 역시 이번 앨범 「Revolution」이 밴드의 20주년을 자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것이 앨범의 스타일이나 주제, 심지어 밴드가 마련한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들과 의도적으로 연계되지는 않는다. 그저 밴드의 열한번째 앨범이며 꾸준히 자신의 음악을 이어가는 정통성에서 벗어나지 않은 앨범이며, 틸로 볼프의 음악적 열망과 안네 누르미의 감각, 이 모든 것이 라크리모사에 벗어나지 않은 앨범이다.
틸로 볼프는 앨범 타이틀에서 각 앨범의 스타일이나 주제를 암시하곤 했는데, 이번 앨범은 너무나 노골적이라 오히려 더 다른 이유를 찾게 된다. ‘혁명’이라니… 라크리모사의 혁명은 무엇일까. 어쩌면 밴드는 두 사람의 음악적인 아이디어와 감성으로 20년을 이어온 지금, 뭔가 새롭고 혁명적인 연주를 원했던 걸까?
이번 앨범에서는 확실히 이전 작품들과 달리 주목할만한 몇몇 세션이 눈에 띈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은 차분한 피아노에서 시작해 라크리모사의 음악에서 클래시컬한 웅장함을 선사해준 오케스트라 슈필만-슈니더 필하모니(Spielmann-Schnyder Philharmonie)의 연주로 이어지는 앨범의 톱 트랙 "Irgendein Arsch Ist Immer Unterwegs"다. 이 곡은 음산함은 과거에 비해 줄었지만 무척 다양하고 정교한 장치로 대중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는 곡이라 앨범의 톱 트랙으로 적절하다. 여기에서 기타를 연주한 인물은 크리에이터(Kreator)의 리더이자 보컬, 기타로 활동하는 밀레 페트로차(Mille Petrozza)이며, 오케스트라의 클래시컬한 서정과 반대편에서 균형을 맞춰주는 드럼은 억셉트(Accept)의 슈테판 슈바르츠만(Stefan Schwarzmann)이다. 그동안 라크리모사를 생각해보면 이런 구성은 거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블 매스커레이드(Evil Masquerade)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하는 헨릭 플라이맨(Henrik Flyman)이 참여한 것도 눈에 띈다. 물론 그가 앨범 전체에서 종횡무진한 건 아니지만 앨범의 핵심곡이라고 할 수 있는 "Feuerzeug"과 "Rote Sinfonie"에서 묵직한 연주를 선사한다. 지난 앨범 수록곡 "A Prayer For Your Heart"에서 처음으로 작곡에도 참여했던 안네 누르미는 이번 앨범에서도 틸로와 함께 "If The World Stood Still A Day"에 공동 작곡가로 참여했다. 안네 누르미가 작곡에 참여한 곡은 라크리모사의 음악에 여성성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If The World Stood Still A Day"는 전체 편곡에서는 록적인 편곡이 강하지만 그녀의 보컬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인지 바로 그런 여성성을 느끼기 해준다. 라크리모사는 이번 앨범에서 엄청난 사운드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서 ‘전형적인’ 라크리모사의 클래시컬 심포닉 고딕메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간간이 클럽비트로 전환될 수 있는 인더스트리얼 취향의 곡들, "Verloren"과 앨범 타이틀 곡 "Revolution" 등도 있지만 역시 대세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혁명적인 곡은 "Interlude - Feuerzeug (Part 1)"과 "Feuerzeug (Part 2)"으로 이어지는 접속곡 "Feuerzeug"이다. 가장 라크리모사답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또 한 곡은 라크리모사의 음악에서 웬만한 러닝타임의 대곡은 대곡도 아니지만, 어쨌든 이번 앨범에서 가장 긴 러닝타임을 가진 11분 5초짜리 대곡 "Rote Sinfornie"는 클래시컬한 사운드와 록 사운드의 결합, 그리고 비통하고 무겁고 침울한 라크리모사의 음악세계를 다각도로 재현해준 서사시다.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세계 각국의 고딕메틀 밴드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밴드들이 음악성을 바꾼 후 서서히 사라져간 고딕메틀계에서, 라크리모사는 정말 현명하고 영민하게 자신의 음악을 유지하면서도 혁신을 거듭해왔다. 20년동안 라크리모사의 음악을 해온 이들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사실, 라크리모사는 열한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동안 매번 아주 조금씩이라도 자기혁신을 거쳤다. 그리고 밴드가 20주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지난번과 다른, 지금까지 했던 것과 다른, 새로운 음악을 자신의 음악에 담으려 하고 있다. 그게 바로 라크리모사가 20년을 변함없이 유지해올 수 있는 힘이었다. 드라크루와의 그림을 응용한 앨범 커버 속 피에로가 “나를 따르라” 외친다. 20년을 이어온, 어둡지만 멋진 길이다.
2012년 9월. 한경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