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서 지상으로, 그리고 마침내 당신에게로 로로스 [W.A.N.D.Y.]
데뷔작 [PAX]로 2009 한국 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 EBS 스페이스 공감 ‘헬로 루키’, 각종 평단 및 대중에게 록음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그들만의 새로운 어법으로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은 로로스... 그 후 6년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드디어 돌아온 로로스의 새로운 음악적 도전 [W.A.N.D.Y] 힘겹게 꿈을 지키고 있는 당신에게 바치는 송가! -ORM ENT.
로로스(Loro's)의 [W.A.N.D.Y.]는 공식적으로 정규 2집이 된다. 첫 싱글 [Scent of Orchid]와 EP [Dream(s)]를 제외하면 그렇다. 자신들이 하는 음악만큼이나 호흡이 긴 작품 간격을 보여주는 데는 본인들의 의지를 넘는, 멤버들의 군 복무로 인한 2년간의 공백처럼 환경적인 요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1집 [Pax] 이후 6년 만이라는 간격은 길게 느껴진다. 또한 길어진 시간만큼 쌓였을 주변의 기대감은 의도하지 않은 압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 일이란 게 늘 그렇듯이.
그런데 이 새 노래들에서 압박의 기미는 그리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로로스가 주변의 안색을 살피기보다 자기 자신들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커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거나 두렵지 않다는 게 아니라, 지금 (노래)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고, 너무 크고, 절실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미친 듯이 집중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격한 현미경식 자기애를 넘어 (자기애는 오히려 전보다 잦아든 것 같다) 주변 속의 나를 확고하게 인지하는 성찰, 예컨대 360° 파노라마 앵글로 찍은 손톱만 한 셀카에 가깝다. 그래서 이 앨범의 노래들은 그동안 줄곧 환기되었던 로로스의 트레이드마크, ‘꿈’처럼 ‘부유’하는 느낌을 거두고, 땅으로 내려온다. 하늘을 걸으며 눈 뜨고 꾸는 꿈인 줄 알았던, 늘 초월적인 감각(만)을 자극했던 이들의 음악에서 중력을 느끼는 것은 새롭고 이채로운 경험이다.
중력은 로로스에게 혼잣말을 거두고 대화를 시도하게 했다. 1인칭 위주의 가사나 도재명과 하제인의 평소 보컬 스타일에 격변이 일어난 건 아니다. 그러나 들리든 말든 개의치 않을 것 같던, 때에 따라선 불가해하고 어긋난 신탁 같기도 했던 단어와 문장들이, [W.A.N.D.Y.]에서는 상대적으로 일정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며 듣는 이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번 앨범에는 연주곡이 하나도 없다.) 땅에 발을 딛고, 구체적인 의미와 발성이 있는 말까지 하는 로로스는 낯설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가 사는 현실과 가까워졌다. 초월적이어서 다분히 도피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던,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로로스가 이만큼 어른이 되었다.
초창기 이들에게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던 스타일 상의 난점도 이 과정에서 많은 부분 해소가 된다. 포스트 록 장르의 관용적인 어법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지만, 응당 곡마다 거대하게 카타르시스를 터뜨려줘야만 한다는 식의 강박에선 벗어나 있다. 혹은 터뜨리더라도 그 양태가 같지 않도록 배려한다. 밴드의 관성을 거스르는 이 결정은 실제로 수록곡의 많은 부분에 새로운 숨통을 트이게 한다.
그 결과 'Undercurrent', 'Homo Separatus', 'Monster'로 이어지는 앨범의 중심부는 이제까지 중 가장 복잡하고 흥미진진하고 빛나는 로로스 청취 경험을 만들어낸다 — 포스트 록보다 고전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의 억양이 강하게 느껴지는 특징을 각자의 취사선택 사항으로 돌리고 나면, 남는 것은 이 곡들에서 최대한 도전적이고 투지 넘치게 달려드는 밴드의 모습이다. 이 곡들에는 복잡한 구성을 매끈하게 이어가는 전개, 그리고 실체가 있는 경고와 좌절과 냉소가 자리한다. 그리고 이는 'Senna'에서 'We Are Not Dead Yet', '송가'로 이어지는 앨범 후반부의 희망과 위로와 포기의 구간과 대조를 이룬다. 이런 배치에 밴드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가장 장렬하게 터져 나올 때의 로로스 곡을 듣다 보면 종종, 끝이 안 날 것만 같은 굉음의 무아지경 속에서 정말로 이 노래가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혹은 이 노래가 끝나면 어쩌나 하는 아이 같은 깊은 애착과 두려움이 감지될 때가 있었다. 그 애착과 두려움이 듣는 이의 것인지 밴드의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헌데 적어도 밴드는 이 앨범에 이르러, 드디어 노래가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노래는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정작 곡들의 표정과 화법은 훨씬 많아졌다. 이는 이번 [W.A.N.D.Y.]의 작곡뿐 아니라 편곡과 프로덕션 모두에 해당하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일말의 미스터리는 필요한 법. 이 앨범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고, 이 노래들이 뭘 말하는지 다 알겠다고 나설 용자를 쉽게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로로스는 적절히 추상적인 가면을 쓴다. 어두운 수풀 사이 얌전하게 놓인 작은 꽃다발/꽃무덤 이미지가 타이틀 ‘W.A.N.D.Y.’(지금으로선 수록곡 중 하나인 ‘We Are Not Dead Yet’의 머릿글자라고만 생각될 뿐)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조응하는지는 함부로 추측할 수 없다. 그러나 노래 속 닿지 못하는 인연과 눈물뿐인 후회와 놓쳐버린 기회들이 아무리 마음을 파헤치더라도, 그것이 'U'의 반짝임과 '춤을 추자'의 기다림과 'Babel'의 두근거림을 잊을 이유는 안 된다. 어쨌든 다시 일어나 앞으로 가야 할 이유를 되새겨주는 'Senna'와 'We Are Not Dead Yet'이 묻혀야 할 이유 역시 되지 않는다. 삶이란 꿈꾸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고, 지금 로로스가 장착한 중력은 삶이 나를 당기는 만큼 내가 삶을 당기는 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중력 아래로는 저항하듯 미지의 저류(undercurrent)가 흐를 것이고, 그 저류가 미래에, 지금 이것과는 또 다른, 어떤 돌발적인 놀라움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로로스는 다시 공중으로 떠올라 깃털 같은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제3의 평행 우주 같은 곳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삶에 또 음악에 그런 반전이 없다면 무슨 재미겠는가. 중요한 건 어쨌든 계속 시도해보는 것이다. 성공하고, 실패하고, 슬퍼하고, 배우고, 또 시도하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때까지.
140918. 성문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