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빈 작곡집]은 정식 가수로서의 배호의 출발선상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깊은 앨범이다.
배호의 최초 데뷔곡 “굳바이” “사랑의 화살”이 수록되어 곧 만개할 배호의 잠재적 가능성을 열어보인 소중한 음반이다. 아울러 김광빈 악단에 소속된 가수들의 설익은 보이스와, 이미 한 경지를 이룬 출중한 연주를 담고 있는 가요사에 길이 남을 10인치 초 희귀앨범.
국내 최초, 10인치로 재발매되는 희귀반으로 배호 매니아들이 꼭 소장해야 할 필수 아이템.
희귀사진들로 꾸며진 4page 인서트 포함된 500매 한정반.
<이별의 인사로 시작한 배호의 데뷔>
"굳바이 굳바이 그 인사는 나는 싫어, 굳나잍 굳나잍 그 인사도 나는 싫어" 배호의 가수로서의 첫 마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봉오리가 부르는 낙화의 노래. 인생 마지막 자리에 놓여야 할 작별의 인사가 첫 자리에 놓여 만남의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토록 싫다고 몸부림치던 그 인사가 8년 뒤 어느 날 자기 자신을 향한 화살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1963년 그의 나이 만 21세 꽃피는 봄날이었다.
가요사에서 가수 배호의 데뷔는 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데뷔는 봉오리를 맺다가 져버린 꽃과 같지만 향후 60년대를 통과하는 서민 대중들의 가장 심층에 묻혀 있는 한의 정서를 절규하듯 터뜨리고 삭혀주고 승화시킨 한 인물의 등장이라는 말과 등식을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무명가수들의 집합소인 동 음반(김광빈작곡집)에 다른 노래들과 어깨를 나란히 걸고 있는 배호의 데뷔곡(굳바이, 사랑의 화살)은 언젠가 날아오를 채비를 하며 가지를 움켜쥔 불멸의 새가 물고 있는 매신저다.
배호의 데뷔곡이 담긴 10" 음반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66년 봄 영화주제가로 취입한 <황금의 눈>과 그 직후에 취입한 <두메산골>이 데뷔곡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동 음반이 발견됨으로써 배호의 데뷔 연도가 약 3년가량 앞당겨진 것이다. 1963년은 동 음반 작곡자의 이름을 건 '김광빈악단'이 막 음악적으로 만개해 갈 무렵이었다. 김광빈은 광복 후 중국에서 배호 가족과 함께 귀환 25세 나이에 부산의 <스타 땐스.홀>에 서면서 프로뮤지션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 악단은 60년대 초 국내에선 보기드문 패밀리 악단으로 거듭났다. 배호가 드러머로 합류한 그들의 연주는 환상적인 하모니로 명성을 날렸다. 그 명성은 방송가에까지 전해져 동 악단은 국내 최초 상업방송인 MBC(HLKV)(1961년 12월 개국)에서 <쌍쌍 파아티><톱싱거 대회> 등 연예.오락 프로그램 전속 악단으로 활동하며 가일층 명성을 높여갔다. 이런 인연으로 배호는 가수로 데뷔 몇 년 전 이미 방송에서 <고엽>을 불러 주변에 깊은 인상을 남기며 노래에 대한 끼를 발휘하기도 했다. 일단 연주로 방송계의 문을 연 작곡자 김광빈은 그 여세로 이번엔 노래로 재차 문을 두드렸다. 당시 <호반의 벤치>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권혜경을 픽업 <순정의 문을 두드릴 때>라는 곡을 취입 발표하였으며, 이 곡은 <방송의 문을 두드릴 때>의 단계를 넘어 시내 택시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반향을 일으켰다. 마침 63년 봄 배호 생일 다음 날인 4월 25일엔 제2의 민영 상업방송인 동아방송(DBS)이 개국 팡파르를 울렸고, 동 방송은 <탑튠쇼> 등 기존 방송에 없던 대중밀착적인 프로그램들을 대대적으로 신설 전파를 쏨으로써 향후 도래할 문화적인 변혁을 예고하고 있었다. 배호의 데뷔곡이 담긴 음반도 이와 같은 도정에서 생산된 음반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작곡가 김광빈의 곡은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생경하고 난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구 음악에 원류를 두고 소위 하이크라스한 분위기의 곡에 대한 집념을 꺾지 않은 작곡자의 고집 혹은 예술가적인 정신이 그의 곡들을 주류에 편성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당시 배호도 외삼촌의 음악에 대해서 "거짓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배호의 데뷔곡과 본인 악단 전속 가수들로 구성된 오리엔트 <김광빈작곡집>도 그렇게 방송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와 같은 연유로 조용히 퇴장하는 운명을 맞았다. 비록 데뷔 초년병들로 구성된 동 음반의 노래들이 아직 설익어 풋내가 물씬 풍기지만 노래를 이끌어가는 연주만큼은 한 경지를 이루고 있음을 귀가 밝은 이들은 금방 눈치 챌 것이다.
<뉴보이스 뉴스타로는 발전하지 못하다>
데뷔곡 발표 후(비록 빛을 보진 못했지만) 배호는 당시 대중지에 '뉴보이스 배호(裵虎)'라 소개되면서 가수로서의 조그마한 명함을 새겼다. 본명이 배만금(청소년기엔 배신웅)인 배호에게 직접 예명을 배호(裵湖)라 지어준 외삼촌 김광빈은 虎(범호)와 湖(호수호)사이에서 고민하다가 湖를 선택한 것이 외조카가 단명한 것이 아닌가 하고 서늘해 하기도.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두 가지 음.양의 요소는 배호의 노래 속에 서로 상생의 모습으로 살아 있다. 이런 점이 그가 남긴 노래의 신비로움일 것이다. 하여튼 당시 배호의 가수 데뷔는 단지 곁가지였을 뿐, 그에게 둥치는 드러머 소위 북잽이였다. 배호는 14세 경 부산에 어머니와 어린 누이 동생을 두고 홀로 상경, 음악인 외삼촌들 주변을 맴돌다가 18세 무렵부터 스틱을 잡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의 도움과 피나는 노력으로 빠르게 북을 정복했다. 그에게 북은 그가 몰고 밭을 갈아야 할 소를 잡아 만든거나 다름없었다. 그것 하나로 어머니와 어린 누이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뉴보이스는 뉴스타로 발전하지 못하고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 가요 히트곡 계보는 50년대 <봄날은 간다>를 벗어나 61년 한명숙의 <노란샤쓰의 사나이>에서 64년 남일해의 <빨간구두 아가씨>,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로 달려가고 있었다. 거기에 신중현을 필두로 서구 락 음악이 접목되며 단선 일변도의 국내 음악 코드를 강한 비트로 흔들어 놓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배호의 목소리는 라디오 신호에도 잡히지 않는 미미한 소리로 침묵 속에 잠겨버린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폭발적인 창법으로 대중들의 가슴을 두드리기까지. 그동안 배호는 외삼촌 김광빈악단과 김인배악단을 그치며 일종의 오프라인에서 북을 치고 간간이 노래도 하고 사회도 보는등 미래를 착실하게 다듬어갔다. 66년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배호와 그 악단>의 밴드마스터로 활약하며 장안에 노래하며 북을 치는 사람으로 신선한 새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던 중 배호를 본격 가수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이는 그의 재능을 익히 알고 있었던 김인배였다. 그리고 배호의 외삼촌 김광빈이었다. 각각 둘은 몇 개월 차이를 두고 <황금의 눈>과 <두메산골>을 배호에게 쥐여줬고 이 두 곡은 배호가 정식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한 쌍두마차의 역할을 한 것이다.
<신은 배호에게 재능을 주고 병마로 달리게 했다>
<돌아가는 삼각지>로 배호의 주가가 한창 오르자 혹자들은 그가 "건방지다"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물론 악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목소리가 건방지다는 건지 노래하는 폼이 좀 멋 부리고 건방지다는 건지 배호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어느 대담프로에서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배호는 노래할 때 목소리를 절대 까불지 않았다. 기교나 바이브레이션, 가성을 동원 좀 더 잘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거칠더라도 항상 진정성을 잃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것이 오히려 가슴을 때렸다. 여운을 길게 남겼다. 노래에 대한 이런 측면은 그의 영혼이 어떠했으리라 짐작게 해준다. 배호 사후 여러 모창가수들이 등장 가성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따라가려 하였으나 그의 영혼을 Copy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명 드러머 시절 174 센티의 키에 준수한 외모, 차츰 배호에게 매료되는 팬들이 생겨났다. 그가 업소에서 <녹색의 장미>를 부를 때는 실제 녹색 옷을 입은 여인들이 나타나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일부 극성 여성 팬들은 그가 연주가 끝나면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가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풍성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팬들의 대접을 잘 못 삼킨 것이 화근이 되었다. 어느 날 돼지고기를 먹은 것이 이상 증세를 일으키더니 신장염으로 발전해버린 것이다. 아마 근본적인 원인은 밤낮없이 혹사당한 몸이었을 것이다. 북채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달리고 달려온 나날들, 어느 순간 그가 타고 달리던 말이 병마로 바뀌어 버렸다.
때로는 휠체어, 때로는 동료를 의족 삼아, 때로는 사회자의 등에 업혀 그렇게 병마와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생산해 낸 한과 절규의 노래들.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 결국 홀로 일 수밖에 없는, 버림받고, 이지러지고, 깨어진 자의 편에 서서, 병마는 그에게 고통을 주었으나 한편 그의 천부적인 노래 인자를 발현시키는 촉매로 작용하였다
가요사 목소리 보물 제1호 배호, 2호 이미자…… 동 음반에 실린 배호 노래 두 곡은 그 출발선상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이 철저하게 깨어져 다시 돌아온다. 66년 2월 신장염 발병 이후 4월의 <황금의 눈>, 초여름 <두메산골>, 이듬해 초봄 <돌아가는 삼각지> 그리고 4월의 <누가 울어>로 이어지는 노래들은 그가 병마 타고 울며 간 길의 이정표들이다. 이제 그 출발선이 준비되었다. 10인치 음반의 좁을 골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 보자.
글.해설 최찬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