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테메’라는 말이 있다. 푸코에 의해 유명해진 이 용어는 일종의 ‘인식의 틀’같은 것으로 푸코의 초기 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용어이다. 푸코에 따르면 르네상스 이후 서구문명은 네 개의 에피스테메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네 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각각의 에피스테메 사이에는 커다란 불연속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네 개의 시대는 이어지는 게 아니라 단절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역사는 단계적으로 연속해서 발전해왔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것이다. 여기서 네 개의 에피스테메가 무엇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 에피스테메 사이의 단절이다. 이러한 역사의 불연속성은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작은 사건, 작은 변화가 이런 불연속성을 낳는다. 우리는 음악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장르의 등장으로 인해 음악의 지도가 바뀌는 것을 보아왔다. 물론 여기에는 새로운 종류의 아티스트의 등장 또한 포함되는데, 실제로 19세기에 클래식 음악계는 파가니니의 등장과 함께 큰 변화를 맞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런 변화의 중심에 있는 아티스트는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목하는 바로 그 인물은 ‘막심’이다.
클래식 음악의 관점에서 보자는 막심은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의 한 명일 뿐이다.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는 오랜 피아노 음악의 역사에서 언제나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막심은 자신의 비르투오시즘을 클래식 음악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음악 장르와의 결합을 통해 그동안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이 보여주지 못한 세계에까지 그 화려함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막심은 성공은 스타덤을 넘어 일종의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첫 크로스오버 앨범 <The Piano Player> 이후 이번 4집 앨범 <Electrik>까지 그의 앨범들은 항상 장르와 음악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며 많은 논쟁과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를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부르고 있지만 확실히 그는 다른 종류의 피아니스트이다.
막심의 콘서트 현장은 화려한 무대장치와 조명효과, 거대한 비디오 스크린 등을 갖춘 그야말로 락 콘서트를 방불케 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끊임없이 탄성과 환호를 지르는 거대한 여성팬들. 그야말로 어느 팝 스타 못지않은 인기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아티스트이다. 그는 크로스오버 장르의 음악들을 통해 경이로운 성공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모스크바 필하모닉과 성공적인 협연을 마치고 클래식 연주자로서도 큰 화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리스트 이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쓰기도 한다.
8살때부터 계속 피아노를 연주하고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아왔던 막심은 스스로 밝히길 대학생이 되어서는 레이브 파티며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사실이 학교나 교수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잘 숨겼지만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새로운 형태의 하이브리드 클래식 음악을 통해 빛을 발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도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그의 관심사는 새로운 대중들을 위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는 클래식 음악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아티스트인 것이다. 그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이를 성취하고 있다. 그는 상이한 음악 스타일을 융합시키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있으며, 현대적인 테크닉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사운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 특별한 사운드는 물론 테크노 뮤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한 대중적인 팝스타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와 유사하지만 그들에게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막심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앨범에 포함된 톤키 훌리크의 신곡 ‘Anthem'을 보자. 월드뮤직과 일렉트로니카, 여기에 막심의 피아노 연주가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음악적인 뮤탄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앨범 <Electrik>은 그야말로 막심의 음악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전 앨범들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클래식 음악을 편곡한 것과 막심을 위해 새롭게 작곡한 톤키 훌리크의 신곡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앨범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먼저 막심은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실제로 클럽에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들을 만들려고 했다.
“이번 앨범 대부분의 곡들은 업비트 분위기로 만들었습니다. 제 자신이 클럽과 일렉트로닉 음악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죠. 클래식 음악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이 이런 음악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곡들 중에 하나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는 걸 상상하면 얼마나 흥미로운지 모릅니다.“
그의 공연이 전통적인 클래식 공연과 달리 피아노가 중심이 된 록 콘서트나 레이브 파티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것도 이런 탓이다. 실제로 이번 앨범을 듣고 있으면 그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편 이번 앨범에서는 기존 앨범들과는 다른 색다른 시도들이 포함되어있다.
“제 앨범들에는 빠른 곡들뿐만 아니라 좀 느린 선율의 곡이나 영화음악 같은 분위기의 곡들도 몇 곡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음악을 클럽에서 뿐만 아니라 차 안이나 집에서 편히 쉬면서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영화 <비욘드 랭군>에 사용된 한스 짐머의 곡과 포레의 레퀴엠 중에 ‘천국에서’(In Paradisum), 아바의 명곡 ‘The Way Old Friends Do‘ 등이 그 같은 곡들이다. 그리고 라틴 리듬, 켈틱 선율, 아랍 선율 등 다양한 월드뮤직과의 조우를 보여주는 곡들이 마치 숨겨진 보물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수록곡 해설
The Gypsy Maid
이 곡은 그의 3집 앨범에 수록되었던 '노스트라다무스‘를 연상시키는 도입부와 합창단의 힘차고 경쾌한 노래로 시작한다. 너무나 친숙한 이 멜로디의 원곡은 바로 베르디의 <일트로바토레>에 나오는 ’대장간의 합창‘. 이를 베이스로 특징적인 리듬을 가진 음형이 반복되는 가운데 막심의 피아노 연주가 마치 협주곡에서의 투티처럼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 곡에서 막심은 능수능란한 피아노 연주로 사람들을 자신의 리듬 속으로 끌어 들이는데, 피아니스트라기보다는 마치 클럽의 DJ같은 느낌을 준다.
Requiem
첫 곡과 마찬가지로 힘 있는 합창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베르디의 <레퀴엠>에 나오는 ‘진노의 날’(Dies irae)를 베이스로 강한 테크노 리듬을 결합시킨 새로운 뮤탄트 음악이다. 원곡의 특징도 그렇지만 합창과 일렉트릭 세션의 긴박감이 곡 전체를 지배하는 가운데 그 사이를 막심의 피아노가 격정적인 연주를 펼치면서 이질적인 두 요소를 봉합시키고 있다. 후반은 갈수록 환상곡풍으로 바뀐다. 이 곡은 막심이 이번 앨범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곡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 한 곡의 녹음을 위해 일반적인 세션 외에도 100명의 합창단과 60명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등 무려 17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Child In Paradise
톤키 훌리크의 신곡 가운데 하나로 차분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특히 도입부에 등장하는 여성 보컬의 목소리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가서는 막심 특유의 속주를 중심으로 단순한 음형이 반복되는 가운데 선율보다는 리듬이 강조되는 곡이다.
Anthem
이 곡 또한 톤키 훌리크의 신곡으로 신비로운 여성 보컬을 이용했던 ‘Child In Paradise'와 달리 이 곡에서는 아프리카의 민속음악을 연상시키는 백 코러스가 등장한다. 막심의 피아노 연주는 전체적으로 가요풍의 주제 선율을 중심으로 감미롭게 펼쳐진다.
Hall Of The Mountain King
앨범 발매에 앞서 가졌던 내한 공연에서 한국 팬들에게 선보였던 곡으로,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에 나오는 ‘산 마왕의 궁전에서’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원곡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서 편곡됐는데, 막심의 힘찬 피아노 연주와 오케스트라의 투티가 함께 격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합창단에 의해 산 마왕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막심의 잔잔한 피아노 연주가 이어지기도 한다.
Nathrach
‘Anthem'에 이어 월드뮤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이 곡은 켈릭 퓨전 그룹인 아이오나(Iona)의 멤버인 트로이 도노클레이(Troy Donockley)가 막심의 이번 앨범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이 곡에는 복합적인 지역 음악들이 등장하는데, 켈트 음악을 비롯해 아랍풍의 선율이 사용되고 있다. 막심의 피아노 연주는 가요풍으로 된 선율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후반에 합창단과 세션, 피아노의 합주가 펼쳐지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Beyond Rangoon / Waters Of Irrawaddy
패트리시아 아케트가 주연을 맡았던 존 부어만의 영화 <비욘드 랭군>에 나온 한스 짐머의 음악을 편곡한 곡으로 특히 이라와디강의 정경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감동을 자아내는 곡이다. 이 곡에서는 새로운 편곡이나 특징적인 연주보다는 전체적으로 영화의 감동과 분위기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March Of The Icons
본격적인 레이브 파티에 들어가는 걸 암시라도 하듯 전자음악을 이용한 도입부는 이후에 등장하는 빠르고 흥겨운 리듬과 막심 특유의 선율선이 분명하고 힘 있는 피아노 연주로 한층 뜨거운 분위기를 연주해낸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신곡으로 톤키 훌리크의 감각과 막심의 재능이 잘 결합된 곡인 동시에 클래식과 일렉트로닉 음악의 혼종성이 가장 잘 나타난 곡이기도 하다.
Tango In Ebony
탱고와 막심이 만난다면? 톤키 훌리크의 이 신곡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라틴 리듬과 막심의 피아노,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실험은 막심의 음악 스타일에 상당히 흥미로운 변화를 주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막심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곡으로 추천하고 싶은 곡이다. 전체적으로 곡의 분위기는 탱고의 격정적인 면보다는 감미로운 라틴 리듬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Carmen Entr'acte
유명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나오는 4막의 간주곡을 편곡한 곡이다. 이 곡에서는 막심 특유의 긴박감 넘치는 속주나 웅장한 느낌의 오케스트라와의 합주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로맨틱한 느낌을 지닌 곡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피아노 협주곡의 아다지오 악장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곡이다.
Prelude in C
바흐의 전주곡 C장조를 강한 비트를 지닌 일렉트로니카로 만든 곡이다. 클래식한 면보다는 온전히 일렉트로닉 효과가 강조된 곡으로 막심의 피아노 연주는 단순한 효과로만 사용될 뿐 중심을 이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대적인 테크노 리듬으로 재탄생한 바로크 음악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곡이다.
In Paradisum
포레의 <레퀴엠> 가운데 ‘천국에서’를 편곡한 곡으로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곡이다. 막심의 피아노 연주는 분명한 선율적인 특징을 지니기보다는 단조로운 선율을 연주하면서 전체 곡의 분위기에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The Way Old Friends Do
아바의 1980년도 앨범 <Super Trouper>에 수록된 ‘The Way Old Friends Do’를 편곡한 곡으로 전체적으로 원곡의 멜로디를 잘 살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중간에 행진곡풍으로 바뀌면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화려한 합주를 통해 웅장하고 감동적인 클라이막스를 이끌어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