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치료쿠는 벌써 두 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빠른 속도로 많은 팬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멀티 인스트루멘틀리스트입니다. 아직까지 대중앞에 나서기를 쑥스러워 하는 이 뮤지션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것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홈페이지에 남겨진 많은 감탄사들처럼 그의 음악은 깊은 서정의 선율속에 마치 <모든 이들을 위한 사운드트랙>으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바이올린과 첼로, 플루트와 같이 매혹적인 멜로디를 뿜어내는 악기들 사이에 절제된 피아노 소리는 감성적이지만 결코 감상(感傷)에만 빠지지 않고 세상에 살아가는 행복이란 마치 이런 것이다라고 말해주듯 청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줍니다. 듬뿍 향신료와 조미료를 담은 기름진 음식들과 같은 자극적인 음악들로 가득한 지금 담백하고 청량한 한잔의 녹차와 같은 에릭 치료쿠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에 충분할 것 입니다. 시들어버린 꽃들이 싱싱한 새로운 꽃들로 바뀌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면서 문득, 소중한 사람들은 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에릭 치료쿠의 말처럼 소중한 사람들의 가슴에 남겨둘 아름다운 음악들로 가득 채워진 한편의 동화 같은 겨울 이야기 (Winter Story)에서부터 에릭 치료쿠와의 인연은 시작될 것입니다.
자연과 인생의 신비를 노래하는 바람의 멜로디
Eric Chiryoku <Winter Story>
강민석 / 음악칼럼니스트
안데스 산맥의 빙하와 카리브해 중간쯤 콜롬비아의 산악지대에는 세상과 등진 채 외따로 살아가는 코구이라는 인디언 부족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자기들이 사는 산은 이 세계의 축소판인 하나의 소우주입니다. 그리고 물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이랍니다. 코구이 부족의 언어에서 ‘물’이라는 말과 ‘영혼’이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아울러 모든 가르침은 ‘물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되기도 한다니 물은 생명 자체, 즉 살아 있는 존재인 것이죠. 작은 시냇물은 아기이고, 큰 강은 어른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산악지대에 은둔해온 이 부족은 외부 세계와 전혀 접촉이 없었는데, 최근에 와서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고립된 세계에서 벗어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문명세계가 그들의 물에 끼친 결과를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모든 유기체의 표상인 바닷조개가 점점 사라지고, 눈과 얼음으로 덮인 지역이 줄어들고... 세계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코구이 인디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문명인들이 이 지구를 금방이라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이들은 서구 문화를 ‘구름을 파는’ 문화라고 비난했습니다. 문명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다고, 생명과 존재의 근본인 물이 그들에게 예언해주었다고 합니다.
코구이 인디언만큼은 아니지만 이른바 문명인인 우리들 역시 푸른 산과 맑은 물과 조각구름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편리한 삶의 양식에 안주하면서도 그 결과들 대부분이 지구 온난화에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말이지요. 적어도, 구름을 파는 문화의 대변자는 되지 말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러한 성찰이 있는 곳에 조용히 찾아와 귀와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 음악은 초원에 부른 바람의 속삭임과, 양떼 같은 구름과 사계절의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자연을 사랑하고 그 감정을 그대로 선율로 옮긴 네오 클래식/뉴에이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Eric Chiryoku의 앨범 <Winter Story>을 채우고 있는 자연의 사운드트랙입니다.
지극히 동양적이면서도 멜랑콜리한 선율과 오케스트레이션의 조화가 돋보이는 <Winter Story>에는 자연의 아름다움, 사계절의 로망, 시원하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아침의 산들바람들에 대한 찬미와 아울러 인생의 희노애락과 동반하는 반추와 위안의 미감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자연이라는 궁극의 대상을 향한 긴 여행인 삶을 바라보는 음악가의 인생관이 잘 드러나는 음악들입니다. 플루트가 맑고 청아하게 노래하는 회상과 반추의 보이스 오버. 늘 비의적(悲意的)인 토로의 목소리였으나 여기서는 넉넉한 희망을 노래하려 하는 바이올린과 스트링. 천천히 흘러내려가는 시냇물처럼 초연하게 무언가 말하는 피아노. 나레이션이나 대사가 생략된 하나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감상하듯 순수 자연과 달콤한 기억들 그리고 세상의 예리한 날에 베인 상처를 향한 치유와 위안의 손길로 가득한 이 멜로디와 화성들은 일본계 싱가포르 음악가 에릭 치료쿠가 2005년에 발표한 첫 번째 연주앨범으로서 ‘International Online Music Award’에서 ’Best Soundtrack’ 부문에 후보작으로 오르기도 했습니다. 동양적인 서정미가 돋보이는 멜로디 전개가 일본계 음악가임을 잘 알 수 있도록 할뿐더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키 쿠라모토, 센스, 마사츠구 시노자키, 이사오 사사키, 나카무라 유리코 등 당대 최고의 뉴에이지 계열 일본 음악가들의 음악과 비교할만한 트렌디한 성향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멀티 인스트루멘틀리스트 에릭의 음악들이 담고 있는 자연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과 아울러 드라마틱한 터치는 조금 더 듣는 이의 가슴 안 심연을 자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본 앨범 <Winter Story>에 이어 봄의 서정을 담은 <Spring Of Life>도 곧 선보일 예정입니다.
단촐하게 절제된 열 개의 트랙은 길지 않으나 가을을 지나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서정이 진하게 농축되어 각자의 마음 깊이 놓인 사연들을 오래된 사진첩처럼 하나하나 정돈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동양적이고 쓸쓸한 겨울의 풍경과 먼 길을 떠나는 이름 모를 길손의 모습이 떠오르는 구슬픈 선율로 시작하여 모든 삶의 희노애락이 함축된 겨울의 광활한 서정을 담고 있는 ‘Winter Story’(트랙 1)가 한 편의 드라마를 여는 주제곡이자 서곡처럼 진지하게 문을 엽니다. ‘Season Romance’(트랙 2)의 도입부 전주는 프랑스 영화 음악가 에릭 세라가 즐겨 쓰는 스케일을 떠올리게 하는 환상적인 화성의 키보드 연주가 인상적입니다. 마치 해저의 신비로운 풍경으로 인도하듯 하는 전주 뒤에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전개하는 주선율은 겨울이든 가을이든 봄이든 자연의 축복일 따름인 계절의 로망을 소박하고 열정적으로 전해줍니다. 북유럽의 신화를 메타포로 담은 프로그레시브록에서나 들을 법한 간결하면서도 판타지적인 전주와 간주 부분의 피아노 연주에 이어 눈부시게 푸르른 초원의 생명력을 감동적으로 묘사하는 플루트와 바이올린 솔로가 돋보이는 ’Meadow Whisper’(트랙 5) 역시 추천하는 곡입니다. 시원하게 머리칼을 스쳐가는 아침 바람의 감촉을 경쾌한 숨결을 살려 묘사하는 ‘Morning Breeze’(트랙 7)은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한 뒤 다시 새로운 기운을 맞이하는 아침에 들으면 좋을 듯합니다. 이밖에도 어느 하나 예외없이 정성스럽게 빚어진 한 곡 한 곡 모두 마음의 상처나 삶의 무게에 눌리어 있는 이에게는 따뜻한 위안과 자유의 기운을, 외로움에 지친 이에게는 긍정적이고 밝은 기운을, 자연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바로 그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있는 자연의 주제곡을 선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