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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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2:20 |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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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 1:47 | ||||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나는 숲을 찾는다 숲에 가서 나무와 풀잎의 말을 듣는다 무언가 수런대는 그들의 목소리를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들의 은유(隱喩)를 이해할 것 같다. 이슬 속에 지는 달과 그들의 신화를, 이슬 속에 뜨는 해와 그들의 역사를, 그들의 신선한 의인법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울면서 두려워하면서 한없이 한없이 여기 서 있다 우리들의 운명을 이끄는 뜨겁고 눈물겨운 은유를 찾아 여기 숲속에 서서 -시집 『답청』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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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 5:33 | ||||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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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 1:41 | ||||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시집 『시를 찾아서』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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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2:26 | ||||
눈이 내린다 기차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한다 -『창작과 비평 2002 여름호』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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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4:51 | ||||
7. |
| 1:54 | ||||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시집 『시를 찾아서』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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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1:47 | ||||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雲雨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나가고 싶다 -시집 『시를 찾아서』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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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 3:57 | ||||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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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1:31 | ||||
11. |
| 2:23 | ||||
나는 안다
그대 눈 속에 드리운 슬픔을 내가 그윽한 눈으로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대 눈 속의 남해 바다 그대 눈 속의 보리암 그대 눈 속의 연꽃 그대 눈 속의 그림자가 그대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나를 저물게 한다 나는 예감한다 내 눈 속에 잦아들 어둠을 죽음이 내 눈을 감길 수는 있겠지* * 프란시스꼬 데 께베도의 시구를 인용. -시집 『시를 찾아서』 수록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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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2:25 | ||||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수록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