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것이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나에게 닥친 두려움을 이겨나가는 과정이라 본다. 그리고 조금 과장되는지 모르지만 음악을 듣는 것도 어찌 보면 길을 잃고 해매는 아이가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며 집을 찾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다. 특히 재즈처럼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음악은 거의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해 길을 해매는 것과 같은 수준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음악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음악’ ‘새로운 연주자’를 만난다면 이 세상 모든 음악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위로와 격려를 해줄 것이 분명하다. 이럴 때 흔하지는 않지만 단번에 필이 꽂히는 연주자가 있는데 이번에 데뷔 앨범을 발표하는 피아니스트 허대욱이 바로 그런 새로운 연주자이다.
6학년 때 모차르트를 듣고 작곡을 결심하다
최근 피아노 앨범을 발표하는 국내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연주력, 녹음기술 등 전반적으로 수준이 높아진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특히 곡을 만드는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송영주, 임미정, 배장은, 남경윤 등 모두가 재즈 스탠더드만을 연주하지 않고 곡을 만들고 멤버들과 교감하면서 자신만의 연주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허대욱 또한 그러한데 그의 히스토리(가족 구성원)를 보면 대강 짐작이 간다. 그의 아버지인 허병훈은 일찍이 클래식 기타의 본고장인 스페인으로 유학을 갔다 온 클래식 기타 연주가로 국내 클래식 기타에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기타연주가 협회장이기도 하다. 또한 허대욱의 누나인 허원경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은 기타 연주가로 스페인 유학 후 연주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이쯤 되면 그의 어린 시절이 대강 짐작이 간다. 아버지의 스페인 유학으로 어린 시절 5년간 스페인에서 살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음악이 흐르는 집에서 남들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허병훈은 누나를 연주가로 키우고 본인에게는 음악을 그냥 취미로 즐겼으면 했다고 하는데 피는 속이는 못하는 법이다. 피아노를 배우고 있기는 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모차르트 교향곡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작곡을 무작정 장래희망으로 정하게 된다. 이전까지 스페인의 기타 연주곡을 주로 들었는데 새로운 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모차르트를 만나게 하고 재즈를 연주하게 까지 이끈다.
즉흥연주가 살아있는 허대욱의 연주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며 중,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작곡과로 진학하게 된다. 당연히 이때는 클래식 학도로 재즈 피아니스트가 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인상주의 음악을 좋아하고 두려움 없이 새로운 것에 다가가는 허대욱의 진취적인 성향은 끝내 재즈와 만나게 되고 연주하게 한다. 이때 재즈 피아니스트 김성관을 만나게 되어 사사를 받게 된다. 전통 재즈인 비밥을 연주하는 김성관의 스타일과 허대욱의 클래식컬한 연주가 부딪히면서 강한 스파크가 일어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클래식에는 없지만 재즈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즉흥연주’라는 매력에 빠지게 된다. 이때 재즈 콩쿨 1위에 오르고 자신의 트리오를 결성하여 소극장 공연을 시작하게 되는데 재즈 스탠더드보다는 서정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정서가 깃든 자신의 창작곡을 발표한다. 그리고 지금은 데뷔 앨범 발표와 함께 그렇게 꿈꾸던 프랑스 유학을 앞두고 있다. 드뷔시나 라벨 등 프랑스 작곡가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재즈 피아니스트가 아니어도 프랑스에 유학을 가고 싶다는 허대욱의 말처럼 그는 이제 또 다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날 준비를 끝낸 상태이다. 예전 윈튼 마살리스가 “나는 클래식을 연주할 줄 아는 재즈 연주자”라고 했던 말이 있다. 허대욱의 음악을 유럽 재즈, 클래식컬한 재즈 등 여러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즉흥연주가 살아있는 허대욱 연주’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말인 듯싶다.
점점 빠져들게 되는 피아노 선율
아버지가 제목을 정했다는 ‘Two Shadows Of One Man’(한사람의 두 그림자)은 지속적으로 부딪히는 불협화음이 감상자를 긴장 시키고 리듬감을 만들어간다. 드럼의 브러시 연주와 베이스의 단순한 워킹 연주가 피아노의 파격을 점잖게 한다. 본 작에 있는 ‘Memory’ ‘Altitude’ ‘Image’ (기억, 고도, 영상)는 원래 한 곡으로 만들어진 곡이었으나 이번에 새롭게 녹음하면서 세곡으로 나누어 따로 녹음되었다. 음악의 스타일과 형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허대욱의 ‘기억’ 속 재즈는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는 곡이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멜로디는 테마와 즉흥연주의 구분을 넘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거닐다, 산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Roam’은 발라드 연주로 케니 드류 트리오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이필원의 베이스 솔로 이후 허대욱의 즉흥연주는 그림 같다.
앨범 타이틀곡이기도 한 ‘To The West’는 피아노 솔로 연주이다. 서쪽은 ‘이상향’을 뜻하는 의미로 서방세계를 지향하는 진취적인 희망과 갈망을 담아내었다. 2분여를 조금 넘는 짧은 곡이지만 빠른 템포로 즉흥연주가 이어져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와 같은 느낌이 전해진다. 이어지는 ‘Classical Ballade’도 피아노 솔로 곡으로 2005년 소극장 공연 시 ‘코랄’이라는 제목으로 연주한 곡이다. 타이틀처럼 클래식컬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성부들 간의 관계를 선율로 해석하려 한 면이 눈이 띈다. 클래식 작곡을 오랜 기간 공부한 면을 느낄 수 있다. ‘사원’ ‘사찰’하면 동양적인 뉘앙스를 전해주는데 ‘At The Old Temple’에서는 말렛(타악기를 연주하는 스틱의 일종으로 앞부분이 천이나 고무로 덮여있다)으로 연주하는 드럼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반복되는 드럼 연주로 인해 고 사찰에서 가부좌를 한 스님이 돌리는 염주가 오버랩 되기도 한다.
비밥에 ‘ist’를 붙여 ‘비밥을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된 ‘Bopist’는 현대적인 포스트밥 스타일로 악기들 간의 유니즌이 특징이다. 그러나 허대욱을 비밥퍼라고 하기에는 스타일이 너무나 자유분방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Altitude’는 이전에 ‘기억, 고도, 영상’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곡이다. 허대욱 트리오의 장점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곡으로 거침없는 플레이와 강약을 조절하는 멤버들의 호흡이 사전 지식 없이 듣고 있으면 ECM이나 프랑스의 스케치 레이블의 연주를 듣고 있는 듯하다. ‘Song Of The Moon’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미지 연상을 위해 달을 제목으로 정했고, ‘A Day’는 빠른 곡으로 반복되는 리프가 인상적이다. ‘Image’는 ‘기억, 고도, 영상’이 한 곡이었을 때 제일 처음 작곡된 곡으로 ‘영상’에서 시작해서 ‘기억’이 작곡되고 ‘고도’가 만들어졌다.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으로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 ....